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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州視聽合紀와 獨島 은주시청합기와 독도 은주시청합기  
2008/09/12 11:25

http://blog.naver.com/kwonoyub/110035224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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隱州視聽合紀와 獨島



權五曄*


목 차

Ⅰ 서문

Ⅱ 鬱陵島와 隱州

1隱州視聽合紀의 등장

2此州의 해석

3誤謬의 전체

4州와 島

Ⅲ 昧谷의 隱州

1朱印의 磯竹島

2昧谷의 隱州

Ⅳ 西方又無疆

Ⅴ 결론






Ⅰ 서 문

『은주시청합기』는 은주의 역사, 지리, 산물, 풍속, 조세 등을 기록한 풍토지다. 그 은주가 원거리에 위치하는 유배지로서의 성격이 깊어, 도성 사람들은 그곳에 가는 것 자체를 기피하는 곳이었다. 그런데도 그것에 관심을 보이는 것은 그것이 한일 양국간에 문제가 된 영토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피할 수 없는 기록이기 때문이다.

1667년에 그곳의 관리를 위임받은 사이토칸스케(齋藤勘助)가 부임하여 2개월만에 써낸 것이 4권 구성의『은주시청합기』였다.「서」와 개관을 기록한「국대기」가 있는 권1과 각지의 특성을 기록한 권2~권4로 구성되어 있다. 권4에는 와카(和歌) 11수와 사사(寺社)의 일람,「다쿠히산 연기(燒火山緣起)」,「몬가쿠론(文覺論)」이 첨가되어 있다. 권1과 권4에 저자의 인식이나 저술의 의미 등이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관리자에 불과하나 관리를 임명받은 이상 효율적으로 관리해야 했다. 그래서 신불에 기원한다. 사사명을 열거하고 와카를 기록한 목적이 거기에 있다.

지금까지의 논쟁에서는 저자의 인식이 배제되고 있었다. 그리고 극히 한정된 부분을 전체인 것처럼 해석하고 있었으며, 특히 죽도를 일본령으로 보았다는 부분이 중시되고 있었다.

일본은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타국의 가치를 폄훼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는다. 19세기에는 관념적인 신화를 근거로 제국주의 사상을 정당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의 연장이 자료의 기묘한 조합과 해석을 통해 소유를 입증하려는 독도/죽도 문제다. 일본은『은주시청합기』,『죽도고(竹島考)』,『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竹島渡海由來記拔書控)』 등의 기록을 근거로 독도/죽도의 소유를 강변하지만 그것들을 읽어보면, 오히려 일본의 소속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그것들을 증거로 제시하는 것이 일본이다.

우리 자료를 일본이 해독하는 것은 비교적 간단하다. 그러나 일본의 자료는 다르다. 상당히 전문화된 특수한 능력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일본자료는 공개한다 해도 비공개와 다름없다. 공개되어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독자의 책임이다.

『은주시청합기』를 근거로 죽도/독도의 소유를 입증하려는 일본의 노력은 이미 설득력을 잃고 있다. 부분의 해석을 근거로 하는 주장이 전체적인 흐름을 근거로 하는 주장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기 전에는 부분의 해석을 근거로 서로가 그 소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목적이 앞서 상대의 주장을 부정하기에 급급하다 결국에는 같은 논리와 방법론에 휘말리곤 했다. 그러나 전체를 조감하는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에 따라 독도/죽도가 은주의 영역밖에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져, 이미『은주시청합기』를 근거로 독도/죽도의 소유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계속해서 검증 보강되어야 한다. 기존 논문들이 간과한 곳도 있고 해석이 애매한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문제가 된 부분은 일본의 경계를 이 주로 한다는 의미의「日本之乾地以此州」에 대한 해석이었다. 이곳의「주(州)」가「송도・죽도」로 표기된「도(島)」와 동의라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전 기록을 통해「주」와「도」가 동의일 수 없다는 주장과「주」와「도」의 자의가 다르다는 의견이 나와 그 주장은 성립할 수 없게 되었다.

그 주장은 저자의 인식을 통해서도 부정당한다. 저자가 송도와 죽도를 은주의 속지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었다. 저자가 은주를 해가 지는 서쪽의 극지라는 의미의 매곡으로 단정한 것이나 서쪽 바다를 보며 강토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영탄한 것 등이 그것이다. 이하에서는 기존의 주장을 검토하며 은주를 일본의 극지로 여기는 저자의 인식을 확인해 보기로 한다.


Ⅱ 鬱陵島와 隱州

1『은주시청합기』의 등장

울릉도/죽도를 매개로 하는 분쟁은 17세기에도 있었다. 조선이 경제적 가치보다 자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실시하는 사이에 일본어민이 그곳에 들어가 밀렵한 것이 그 원인이었다. 조선의 무관심 속에 80년 가까이 도해하던 일본 어민이 그곳에서 조선인을 납치하고 또한 조선에 조선인들의 도해금지를 요구했다. 1693년의 일이다. 이를 계기로 양국 간에 그 소속을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는데, 일본이 처음과 달리 일본인의 도해를 금지하는 것으로 종결되었다. 이후로도 조선의 도해금지 정책을 지속되었다.

그러다 일본이 1905년 2월에 울릉도를 의미하던 죽도를 송도의 새로운 도명으로 하여 시마네켄(島根縣)에 소속시키고 만다. 조선의 의사와 관계없이 취한 독단적 침탈행위였다. 조선은 침탈당해 항의할 방법을 상실한 상태였다. 일본제국이 멸망하고 한국이 독자적일 수 있게 되었으나 6․25동란이라는 민족의 고통을 앓고 있을 때, 일본은 미국의 모호한 자세를 배경으로 1905년에 행한 침탈의 정당성을 강변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독도/죽도 문제의 발단이었다. 제국주의로 축적한 부와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일본의 공세에 독립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외교 경험이 일천한 당시의 정부로서는 대처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이다.

그 때 일본이 증거로 제시한 것이『은주시청합기』였다. 1953년 7월 23일부 일본의 견해나 동년 9월 9일부 한국의 견해에는 그것에 대한 언급이 없었으나 1954년 2월 10일부 일본의 견해에 그것이 사료로 등장했다.


죽도는 옛날에 송도라는 이름으로 일본인에게 알려져 일본영토의 일부로 생각하고, 또 일본인에 의해 항해상 또는 어업상 이용되고 있었다. 특히 도쿠가와 3대장군 이에미츠(家光)의 시대에 막부로부터 요나고(米子)의 어민 오야(大谷), 무라카와(村川) 양가에 죽도지배가 허가되어, 울릉도로 도항할 때 항상 이 섬이 중계기지로 이용됨과 동시에 동도에서의 어렵도 이루어지고 있었다. 우에 관한 문건으로서는 간분(寬文) 7년(1667)에 이즈모번사(出雲藩史) 사이토 아무개(齋藤某)가 편찬한『은주시청합기』, 엔호(延宝) 9년(天和 원년=1681)의 오야 큐에몬타카노부(大谷九右衛門崇信)의 수기 등이 있고


라고 일본이『은주시청합기』와『竹島渡海由來記拔書控』을 증거로 하여 일본령임을 주장했다. 그러자 한국 정부는 그것들이 일본의 울릉도 침략기에 기록된 것이므로 인정할 수 없다고 답했다. 지금 보면 양국 모두가 사실적이지 못한 것을 근거로 해서 주장하고 부정하고 있었다. 국내 사정상 차분히 대응하지 못한 한국 측의 당혹감을 엿볼 수 있다. 이를 계기로 한일 간에는『은주시청합기』의 해석을 근거로 하는 영유권 주장이 평행을 이루며 반복되게 된다. 그것은 일본의 주장에 한국이 대응하는 형태로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기록물의 시대적 배경이나 전체상을 고려하지 않는 논쟁의 되풀이였다.


2 此州의 해석

문제가 되는 것은「국대기」의 다음 부분이다.


북서 방향으로 2일과 1야를 가면 송도가 있다. 그곳에서 다시 1일 정도에 죽도가 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이소타케시마로 대나무나 물고기 강치가 풍부하다. 이 두 섬은 무인의 땅이다. 이곳에서 고려를 보는 것은 운슈에서 인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것으로 일본 극지의 한계로 한다.

이 중에서도「이곳에서 고려를 보는 것은 운슈에서 인슈를 바라보는 것과 같다. 이것으로 일본 극지의 한계로 한다(見高麗如 自雲州望隱州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는 부분이 논쟁의 중심을 이루었으나, 그것은 결국「차주」의 해석에 집중된다. 이곳의「차주」가「은주」와「죽도」 어디를 의미하는가의 문제였다.「차주」가 은주를 가리키면 그 서쪽에 있는 송도/독도와 죽도/울릉도는 일본령이 아니고, 그것이「죽도/울릉도」를 가리키면 그 양도 모두가 일본령에 속하기 때문이다.「차주」를 울릉도/죽도로 해석하는 주장을 살펴보기로 한다.

「은주시청합기에 울릉도 즉 죽도를 무인도라며(중략) 편자는 이 섬으로 일본 서북해에 있는 우리 영토의 극점으로 했다」

「죽도는 오늘의 울릉도로, 이것이 나라의 경계라고 편자는 말하고 있 다」

「1696년의 죽도1건이 결착되기 이전의 시기 1667년에 정리된 문헌인 이 상, 막부의 특별허가를 얻어 죽도 도해사업이 행해지고 있는 시기이기 때문에 죽도를 일본의 서북경으로 생각하고 기술한 것은 당연하다고 보 아야 한다」

등이었다. 이에 대해「차주」를 은주로 보는 설은 다음과 같다.

「즉 차주라는 것은 은주인 은기도를 말하고 있으나, 일본인들은 지금도 차주라는 것은 죽도와 송도로 해석하며, 외교문서에 인용하고 있다」

「일본 측이 이것을 오독하여「전이도(前二島)」를 일본 서북부의 한계로 한 것은 큰 잘못이다. 은주를 일본의 서북부 한계로 한다는 은주시청합 기의 기사야 말로 정당한 견해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이 일본 측 사료는 발굴자의 의도와 달리, 울릉도와 독도가 고려 (한국) 영토로, 일본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고 있다」

「은주시청합기의 표현은 한국 측의 주장처럼 은주를 일본의 경계로 이야 기하고 있다고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외에도「차주」가 은주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많다. 양쪽의 의견을 접하다 보면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 혼란은 문장의 난해를 원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의 흐름을 감안하지 않고 부분의 해석에 집착하는 것을 원인으로 한다. 해석의 목적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편의적인 해석이 그 원인이다.

이곳의 해석에 많은 노력을 경주한 이가 다가와 코조다. 그는『隱岐國古記』『日本輿地路程全圖』 등의 자료를 인용하며「차주」의 의미를 규명하려 했다. 먼저 그는「此二嶋無人之地 見高麗如自雲州望隱州然 則日本乾地 以此州爲限矣」의「此二島」가 의미하는 송도와 죽도가 문장의 해석에 혼동을 일으킨다고 생각했는지, 고려를 보는 위치가 2도 중의 죽도라는 것을 인식시키려 노력했다. 그러며「此二嶋無人之地」는 위의 문장을 받아 설명하는 것이지「見高麗」이하의 주격이 아니라는 것을 지적했다. 맞는 사실의 확인이다. 그러면서「地」와「見」사이에「自竹島」3자를 보충하면 판연해질 것이라 했다. 그러나 죽도를 기점으로 하는 해석「이곳에서 고려를 보는 것이 마치 운주에서 은주를 보는 것 같다」는 역시「죽도-고려」「운주-은주」의 대응으로 종전의 그것과 달라진 것이 없다.

문장에「自竹島」를 보충하는 노력까지 했으나 종전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어떻게 읽어도「죽도-고려」「운주-은주」의 대응이라는 구조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자 다가와는 갑자기「주는 섬이라는 의미다(州はシマの意である)」라는 주를 멋대로 삽입하며「차주」가「죽도」라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그러면서 그것과 다른 주장을 하는 한국의 주장은 기록의 의미를 고의로 왜곡해서 해석하는 아전인수라 했다. 부분의 해석에 사로잡힌 해석의 결과로, 객관적인 해석보다는 미리 설정한 해석을 구하려는 방법의 한계였다. 이런 한계는 전체적인 흐름을 조감하는 방법을 택하는 경우에 한해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문장은 어떻게 읽어도 거리가 비슷한「죽도-고려」와「운주-은주」를 대응 비교하는 내용이라, 그것만으로는 차주의 의미를 규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그 대응하는 것이「隱州」와「松島・竹島」로「州」와「島」가 확실하게 구별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島」와 구별되어 사용된 것이「此州」이므로「此州」의「州」에 대응하는 것은「州」로 표기된「隱州」로 보는 것이 순리일 것이다.「此州」에 대응하는「雲州」와「隱州」를 제쳐두고「松島・竹島」를 그것에 대응시키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3 誤謬의 全體

신용하씨는 96년 4월호『신동아』에「차주」를「은기도」로 해석하고「송도/독도」를 조선령으로 하는 주장을 발표했다. 그러자 시모조 마사오(下條正男)는「사료는 전체를 보고 정확하게 읽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사료는 역시 일부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고 읽어야 하는 것 아닐까」, 「좀더 신중하게 사료를 읽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비난을 반복하며 그 주장을 부정하려 했다. 전체적인 조감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은 맞는 이야기다. 그는 그것을 입증하려는 듯 많은 자료들을 인용하며 주장을 전개한다.

조선의 전적까지 인용하는 자세는 전체적으로 조감하려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제시한 그의 해석은 종전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다른 것이 있다면「고려(조선)를 보고 있는 위치는 당연히 일본령」이라는 주장 정도다. 조선을 보는 위치가 죽도이기 때문에 죽도가 일본령이라는 것이다. 부산에서 대마도를 보면 그것이 부산의 속지라는 것과 같은 논리로 이미 부정당한 바 있다.

그는「차주」를 설명하기 위해「국대기」의 주나 권4의「燒火山緣起」만이 아니라 조선의『지봉유설』『성호사설』 까지도 인용했다. 사료는 일부를 읽고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를 보고 읽어야 한다는 자신의 주장의 실천처럼 보이는 자료의 인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자료원의 확대이지 전체의 흐름을 조감하는 일은 아니었다.『은주시청합기』의 부분을 정의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전체적 흐름을 이해하고 그 흐름의 범위에서 적합한 해석을 해야 했다.

시모조에게는 편의적으로 자료를 선택하고 또 일정한 기준 없이 자료를 인용한다는 문제가 있으나 그보다 더한 것은 사실과 다른 주장을 편다는 것이다. 『은주시청합기』를 논하는 그가 저자명을 혼동한 것도 그것의 하나다.『은주시청합기』의 저자명으로는 齋藤豊宣・ 齋藤豊仙・齋藤勘助・齋藤豊宣勘助・齋藤豊宣弗緩 등이 거론되어 왔다. 그래서 池內敏은 2005년 논문에 齋藤豊仙이라 했던 것을 2006년에는 齋藤豊宣으로 교정하며, 豊宣과 豊仙이 부자간이라는 사실을 규명했다. 大西俊輝도 2002년에 齋藤勘助(豊仙)으로 했다가, 2007년에는 豊宣 또 弗緩 또는 遊外라 이름했다. 齋藤家의 3대의 이름이 豊仙이었기 때문에 2대의 豊宣과 자주 잘못하여 혼동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모조는 齋藤矛緩(1996년)으로 했다가 후에는 齋藤豊仙(2004년)으로 하는데 그에 대한 설명이 없다. 그러나「齋藤矛緩이 隱岐島를 기점으로 한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나「순수하게 읽으면 齋藤豊仙의 의도는 분명하다」라는 설명을 근거로 판단하면 豊仙과 矛緩을 동일인으로 본 것이 확실하다. 이 矛緩이 흔히 이름하는 弗緩을 의미한다면 저자 豊宣의 이명이고 豊仙의 이명이라면 저자의 아들에 해당하는 셈이다. 그런데 아무런 설명도 없이 矛緩을 豊仙으로 바꾼 것을 보면 矛緩과 豊仙을 동인의 이명으로 본 것이 틀림없다. 그의 이름에 대한 안일한 사고는 元和 4년에 磯竹島로 도해했다는 상인 村川를 村河로 표기한 것에도 나타난다.

「국대기」竹島의 주「案神書所謂五十猛」을 증거로 저자가 磯竹島를 자국령으로 인식한 것으로 단정하기도 했는데, 여기에도 허위가 포함되어 있다. 이 주는 20여종이나 되는 제본 모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저자의 아들 豊仙이 보정했다는「을본」에만 존재한다. 따라서 시모조는 아들의 주를 저자의 인식으로 하는 실수를 범한 것이 된다.

또「五十猛」는 죽도를 일본령으로 하는 증거가 는 되지 못한다. 시모조는「이소타케루」와「이소타케시마」라는 속명을 연계하여「울릉도가 속세에서 이소타케시마(磯竹島)로 불려지는 이유를『일본서기』의 신화에 등장하는「이소타케루노카미(五十猛神)」에서 찾아 齋藤矛緩가 고증하는 부분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이소타케시마」의 유래는 따로 있다.『隱岐古記集』은 죽도를「이소타케시마(磯竹島)」로 부르는 이유를「당국에서 옛날부터 이소타케(磯竹)라고 불러오고 있다(中略) 그 섬의 북동 방향에 이쿠타케(弓嵩)라는 고산이 보인다. 그 嵩을 당지인들이 이소타케시마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일까」라고 설명하고 있다. 또『은주시청합기』를 전거로 해서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는『隱岐國風土記』나『隱岐古記集』에는「五十猛」에 관한 주가 없다. 따라서 주를 근거로 은기국이 죽도를 일본령으로 보았다고 결론내기는 어렵다.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그는 권4의「燒火山緣起」의「伯耆國의 大商人 村川씨 등은 막부의 朱印을 받아 大船으로 磯竹島에 갔다」를 저자가 그곳을 자국령으로 인식한 증거라 했다. 외국으로 나갈 때 필요한 것이 朱印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다. 朱印을 받아 도해하는 곳이 磯竹島였다면 그곳은 이국이기 마련이다. 그것을 일본령으로 단정하려면 그럴만한 설명이 있어야 했다.

또 그는『성호사설』이 울릉도를「一州」로 표기한 기록이나,『지봉유설』의「倭奴가 磯竹島를 占據하다」라는 기술을 인용하여「차주」가 울릉도임을 입증하려 했다. 그러나『성호사설』의 경우는 그것을 인용하게 된 필요성이나 기준에 대한 설명이 없고,『지봉유설』의 경우는 침략에서 정당성을 찾는 것으로 설득력을 가질 수 없다. 필요에 의한 자의적으로 인용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기준도 없이 이곳저곳에서 용례를 구하기 보다는『은주시청합기』의 용례부터 조사했어야 했다. 이처럼 이루어지는 자료의 인용은 용례의 소개가 될지는 몰라도 일정한 기록상에 사용된 용어의 의미를 정의할 경우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용어를 포함한 문장의 의미를 변질시킬 수 있다.

그의 결정적인 왜곡은 은기도의 위치에 대한 설명이다. 그는 신용하가 은기도를 일본 서북방의 한계로 규정한 것에서 시점의 기준점을 문제 삼았다. 에도(동경)를 그 중심에 두면 은기도는 서에 해당한다면서, 은기도를 일본의 북서의 한계로 하면 저자가 은기도를 기점으로 한 의미가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아주 객관적인 사실에 의거하는 주장처럼 보여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에도시대의 감각에 의하면 江戶(또는 京都)에서 서방으로 白耆國의 米子에 가서(혹은 幡磨 姬路까지 서방으로 나아가, 그곳에서 서북방향으로 白耆國의 米子로 간다), 그곳에서 북으로 향하여 三保關를 거쳐 隱岐島로 나가기 때문에, 서북으로 느끼는 것은 타당하다. 또 보통 에도에서 보아 西方向은 長崎를 말한다. 長崎와의 대비에서도 隱岐島는 서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시모조는 몰랐을까.

그 시모조가 말하는 전체의 위험성은 이질적 자료를 편의적으로 편집한다는 데 있다. 그는 목적에 맞는 결론을 얻기 위해 성질이 다른 자료를 모아 윤색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조선실록』의 기록을 편집하여,

일본 측은 이미 광해군 7년(1614년)에 조선 측에 대해 울릉도 탐색의 가부를 알리고 있었으나, 조선 측에서는 정식적인 회답이 없어, 이래 일본 측은 실질적 어로장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실 이 경위는『숙종실록』20년(1694) 8월 己酉조에서, 남구만 이 숙종에게「왜가 이 섬(울릉도)을 어채의 장으로 한 것이 오래」라고, 울릉도 귀속 문제의 경위를 주상한 것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라고 마치 조선이 울릉도에서의 일본의 어로를 인정하고, 숙종과 남구만이 일본의 점거를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광해군 대에는 옛날부터 일본과 조선 사이에는 국경의 구별이 있다는 것과 양국의 왕래는 대마도를 통한 경우에만 허가하고 그 외의 왕래는 해적으로 단정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조선이 정식으로 회답하지 않은 것처럼 말하는 것이 시모조다. 남구만이 안용복의 납치사건을 설명하며 태종 이래의 해금정책을 설명하는 일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 해서 그것이 일본 어민이 도해하여 어렵하는 행위의 정당성을 인정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시모조는 그것을 귀속문제로 비약시켜 사실을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시모조는 전체를 이야기하며『은주시청합기』의 여러 곳을 인용하고 조선의 사서까지 인용하고 있었으나, 정작 저자의 은주에 관한 인식을 알 수 있는 부분은 누락시키고 있다. 저자가 은주를「매곡」이라고 표현한 부분과 서방에는 강토가 없다고 말한 부분을 누락시키고 있는 것이다. 저자가 서방의 극지를 의미하는「매곡」을 은기도에 대응시키고, 서방에 강토가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했다면, 그것은 저자가 은기도를 일본의 극지로 보고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전체적 조감을 주장했던 시모조는 그것에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을 보지 못한 것일까, 아니면 보고도 필요로 하는 자료가 아니라 회피한 것일까. 보고도 인용을 회피한 것이라면 그의 인용이 편의적이고, 그가 주장한 전체도 일반적인 의미의 전체가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래서 그가 타인에게 했던 비난이 자신에게 돌아가는 것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말도 있는 것이다.


4 州와 島

池內敏은『은주시청합기』의「州」와「島(嶋)」의 용례를 검색하여 표를 작성했다.「此州」가 의미하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州」와「島」를 동일시하는 시도도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꼭 필요한 작업이었다. 표에 의하면「州」의 전 용례 66예 중 60예가 隱岐國・出雲國을 의미하는 특정의 국명을 隱州 雲州 식으로 약칭한 사례다. 그 외의 6례는「此州」가 4,「隣州」가 1,「一州」가 1이다.「隣州」(국대기)는「隱岐國에 인접하는 出雲國」을 가리키고,「一州」(국대기)도 역시「隱岐國」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경우의「차주」는「국」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나머지 4예의「차주」중, 문제의 차주를 제외한 3예를 문장의 흐림에 따라 읽으면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쉽게 알 수 있다.


①聞元就討隱州……以才又朗假元就威以至此州(國代記)

②于漢于和有以矣哉, 又此州之老惑有秤村上天皇之末孫 而号村上某(卷二上西里)한다

③其沖に松島あり、上に松生て樹間に荒園あり、長事二町ばかり、昔好事者此州に雉の 事を愁て誠に雲州より雌雄を渡して此に放つ、一年を経て終に亡くと云(卷二蛸木浦).

①은 淸家가 藝州의 元就에게 아들을 인질로 바치고 군사를 빌려 은주의 지배권을 차지하려는 이야기다. 이것이 은주를 무대로 하는 이야기인 이상「차주」는 은주일 수밖에 없다.

②는 은주에 사는 노인의 유래를 이야기하며 사용된「차주」이기에 역시 은주일 수밖에 없다.

③ 은 은주의 松島에 꿩이 없어「雲州」에서 꿩을 가져다「차주」에 방목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이므로 이곳의「此州」 역시「隱州」 이외로 해석할 여지가 없다.

이 용례들은「차」에 해당하는 고유명사가 지근거리에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지 않는 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나 전후 문장의 흐름으로 그것이「은주」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의 경우도 전권을 검색한 결과를 바탕으로, 반드시 도명이라고 할 수 없는 지명류가 29예, 특정한 도명으로 사용된 것이 76례, 기타 섬을 의미하는 것 21예로 분류했다. 그리고「此」와 결합된「此島・此嶋」가「蓬島」「大守島」「竹島(基島)」를 의미하고「此二島」가「松島와 竹島」를 의미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것을 근거로 문제의「차주」의「州」를「島(嶋)」의 의미로 바꾸어 해석하여, 죽도(울릉도)가 일본의 북서(戌亥)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이야기로 자의적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했다.

「此州」를 울릉도로 할 경우는「州」를「쿠니」가 아니라 「시마」로 읽어야 하는 것에 무리가 있다는 것이 大西俊輝의 주장이다.『은주시청합기』에 나오는 모든「州」가「쿠니」로 사용된다는 것을 확인한 후의 결론이다. 그러면서「州」와「嶋」를 비교 설명하고 있다.

「州」는 원래 강 가운데 생긴 中州를 가리킨다. 그 흐름 속에 있는 상형문자에서 비롯되었다. 농업을 시작한 옛날에 관개에 편리한 州에 사람들은 모여 들었다. 사람이 모이면 쿠니(國)가 생긴다. 상고의 중국에서는 사람이 모인 토지를「州」라 표현했다. 九州(冀州・兗州・靑州・幽州・揚州・荊 州・豫州・幷州・雍州)가 그 경우에 해당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로 일본 전국을 60여주로 표현했다. 安藤廣重의「六十余州名所圖繪」등이 그렇다.

한 편「島」혹은「嶋」는「山」과「鳥」가 합쳐진 회의문자로 철새가 쉬는 바다나 호수의 작은 섬을 말한다. 즉 島嶼로 이곳에는 사람이 있어도 없어도 상관없다. 그러므로 隱岐나 佐渡나 淡路나 對馬는 州이며 島다. 出雲이나 石見 伯耆는 州이지만 島는 아니다. 松島나 竹島는 島이지 州가 아니다. 松島나 竹島에는 사람이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쉬운 예를 들자면 폭력배들이 차지하는 구역(縄張)을 「시마」라고 부르기도 하나 이 경우의「시마」는「州」이지「島」가 아니다. 갈취할 대상으로서의 거주자가 없으면 그들은 존재할 수가 없다. 사람들이 생활하지 않는 곳은 폭력배들이 사는「시마」가 될 수 없다.

이는 태종 이래로 인민을 보호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취한 것에 의해, 울릉도가 무인도로 변한 상황에 맞는 설명이다. 조선이 해금정책을 취하는 동안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도해하여 어렵을 하고, 그것을 근거로 그 영유권을 제기하려 했던 것이다.「주」와「도」를 동일시하는 방법으로「죽도」와「송도」를「은주」의 속지로 하려 했으나『은주시청합기』의 용자법이나 자의상 그 같은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Ⅲ 昧谷의 隱州

1 朱印의 磯竹島

『隱州視聽合紀』에는「磯竹島」의 용례가 셋 있으나,「국대기」 주의 그것이 저자의 아들 齋藤豊仙이 보정한「을본」에만 존재하므로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둘인 셈이다. 그 두 기록을 보면 그곳으로의 도해가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소타케시마에 거너가기 위해 이곳에 머물며 날씨를 가리고 바람을 점친다. 이것은 磯竹島로 도해하려는 자들이 福浦에 머물며 준비하여 도해한다는 것이다. 머물면서 날씨를 살피고 바람을 점친다는 것은 특별한 도해를 위한 준비다. 그 마을에는 弁才天女를 안치안 토리이가 있고 배후에는 中言神社가 있다. 弁財天을 전후에 안치하고 그 수호를 기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신앙이 촌민들에 의해 시작되었는지 磯竹島에 도해하려는 사람들에 의해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도해를 전후하여 일정한 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천기를 점쳤다는 사실로도 추정 가능한 일이다. 그런 연후에 행하는 도해가 일상적이 아니라는 것은 그 긴 준비기간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원록 6년의 도해일지에 의하면 伯州의 米子를 2월 5일에 출발하여, 동 17일의 아침에 出雲의 雲津에 도착하고, 3월 2일에 雲津을 출항하여 隱岐國의 島前의 끝 마을에 당일에 도착했다. 3월 9일까지 동국에 체재한 다음 10일에 島後의 福浦에 도착하여 그곳을 4월 16일에 떠나 17일의 오후 2시에 竹島의 토우센가곶에 도착했다. 2월 5일에 출발하여 4월 17일에 도착했으니, 무려 60여일의 항로였다. 그 중 3월 10일부터 4월 16일까지 45일여를 福浦에 머물며 도해준비를 한 셈이다. 오직 죽도도해만을 위해 45일간을 준비하였는데, 그 사이에 신사의 수호를 기원하고 천기를 점친 것이다. 『은주시청합기』의 여타 항해와 다른 양상이다.

은주의 도해가 어렵다는 것은 後鳥羽院이 유배당할 경우의「폭풍이 이는데 배는 아직 그 파랑 속에 있다…조류를 따라 표류했다」는 경우나 원군이 파도 때문에 島前에서 島後로 건너지 못하여 패하는 경우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서는 도해를 서두르는 긴박감은 있어도 바다가 가라앉는 것을 기원하는 준비된 염원 같은 것은 엿볼 수 없다.

『隱州視聽合紀』의 도해 표현을 보면「爲淸은 동족의 정으로 雲州로 출병했다」「동행하여 隱岐로 건넜다」「같이 雲州로 건넜다」「돌아가려고 했다. 그리고 三保關에 머물며 순풍을 기다리고 있었다」「雲州의 입포에 도착하여 雲州의 동정을 엿보았으나 풍파의 상황은 예상하기 어려워 이곳에서 며칠을 헛되이 보냈다」「기뻐했다. 배를 타고 今津으로 들어갔다」「丹州 若州에서 도적이 와 마을을 자주 습격했다」 등이다. 이 중에는「三保關에 머물며 순풍을 기다리고 있었다」「풍파의 상황은 예상하기 어려워 이곳에서 며칠을 헛되이 보냈다」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은 같은 생활권에서의 일상적인 활동에 지장이 초래된 경우일 뿐이다. 출항이 천기 관계로 중단된 일상적인 일이다. 磯竹島로 가기 위해 장기간 체류하며 날씨를 헤아리고 점치는 것과는 동질적일 수 없다.

은주의 위치를 나타내는 기록에 있어서도 운주의 美穗關, 伯州의 赤崎, 石州의 溫泉津까지의 거리는「里」로 나타내면서 송도와 죽도의 경우는「2日1夜」, 「1日정도」라고「日夜」로 나타내고 있는 것도 저자가 송도와 죽도를 특별한 곳 즉 이국으로 인식한 결과의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그 같은 인식은 소화산의 영험을 이야기하는 곳에도 나타나 있다. 燒火山은 신의 소재로, 정상의 거암에 신이 있어 그것을 신의 본체로 본다. 그래서 신의 영험을 기원하는 곳이고 인간세상의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곳으로 인식하였다. 伯耆國의 상인 村川씨 등이 磯竹島로 도해했다 폭풍을 만나 고구려 쪽으로 표류하게 되자 선장이 燒火山을 생각더니 즉시 漁火가 나타나 포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것이 그 영험담이다. 이 영험을 이야기 하며 저자는 「이국의 영역이라 해도 영험이 없을 리 없다」라며 磯竹島를 이국의 영역으로 표현했다. 磯竹島를 이국으로 보는 인식이 자연스럽게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村川이 朱印을 소지하고 도해한 사실을 소개한 것과도 부합되는 이야기다.


2 昧谷의 隱州

스키군(周吉郡) 간야무라(元谷村)조에는 일신과 월신을 금은으로 장식하여 3년마다 제사하는 「일월제」에 대한 기록이 있다. 옛날부터 전해오는 예법으로서의 제사를 소개하면서 저자는 그것을 「매곡」과 연계해서 설명한다.


생각해 보면 이 일월의 제사는 옛날부터 전해온 유잔의 예법일 것이다. 어느 책에 의하면 매곡에는 지는 해를 거두어들였다가, 그 지는 해를 공경하고 보낸다 라는 구절이 있다. 우리 나라에도 옛날에 이러한 일몰의 예를 행하고 있었던 것일까. 인슈는 서북의 극지로, 분명히 어두운 매곡의 땅이다. 원래 음은 서로 비슷한 점이 있다.


저자가 옛날의 예법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은주를 매곡과 연계시킨 고사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은주를 일본의 극지로 보는 인식의 표현이다. 그런 인식이 없었다면 부정하는 설명을 부가했거나 아예 소개하지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통치하는 은주가 해를 받아들여 공경하고 보내드리는 예를 거행하는 매곡이라는 사실과 그것에 필요한 예를 행했다는 고사에 긍지를 느끼고 그것을 소개한 것일 것이다.

이는『尙書』의 堯典 등을 인용한 이야기로, 그곳에는 해가 뜨는 곳으로서의「暘谷」과 그것에 대응하여 해가 지는 곳으로서의「昧谷」이 기술되어 있다.『淮南子』는 하루를 해의 위치에 따라 구별한다.  


태양은 暘谷에서 나타나, 咸池에서 씼고, 부상을 오른다. 이때를 晨明이라 한다. 부상에 올라, 드디어 운행을 시작하려 할 때, 이것을 朏明이라 한다(약) 이곳에서 羲和를 멈추게 하고, 六龍을 쉬게 한다. 이때를 縣車라 한다. 虞淵에 이를 때, 이것을 黃昏이라 한다. 蒙谷으로 가라앉는다. 이것을 定昏이라 한다. 이렇게 태양은 [崦嵫로 들어가, 細柳를 거쳐] 虞淵의 汜로 들어가, 蒙谷浦에 밤이 밝아 진다.


이곳의 몽곡이 곧 매곡이다. 해가 하루의 여정을 마치고 매곡으로 오면 매곡에서는 그것을 거두어 들였다가(納日) 삼가 받들어서(寅) 예를 차려서 보내드리는 것(餞日)이 예라는 것이다. 이처럼 해가 매곡으로 져서 양곡에서 뜬다는 것은 매곡의 보내 드리는(餞日) 의례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당시의 중국인들은 해가 10개 존재하며 하루에 하나씩 떴다 일몰하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매곡으로 일몰한 해가 일정한 통로를 통해 부상의 아래로 돌아오고 나머지 아홉 개의 해들은 扶桑이라는 나무 아래에서 휴식하며 일출의 순번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이는 매곡과 양곡 간에 통하는 통로가 존재한다는 것으로, 해들이 9일간 휴식하는 부상이라는 나무의 아래가 양곡이면서 매곡이라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는 이야기다. 저자는 매곡이 해를 거두어 들였다가(納日) 공경하고 보내드린다(餞日)는 것에서 그런 의미를 보려 했을 것이다. 그것이 매곡의 은주를 관리하는 대관의 의식이었던 것이다.

그런 세계관은「서해의 外, 大荒 중에 方山이 있고, 산 위에 푸른 나무가 있어, 巨格의 소나무라 한다. 일월이 드는 곳이다」,「顓頊은 老童을 낳고, 老童은 童과 黎를 낳았다. 帝는 童에게 上天를 바치게 하고, 黎에게 下地를 누르게 했다. 下地는 噎을 낳았다. 噎은 西極에 있으며 日月星辰의 운행과 정지를 관장했다」는 것과 같은 전적을 배경으로 해서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세계관이 隱州를 서북의 극지로 했는지, 隱州가 서북의 극지이기에 그러한 근거를 구했는지는 불명이나, 저자가 隱州를 서북의 극지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Ⅳ 西方無疆

신사참배와 와카봉납으로 수호 받으려는 것은 막부질서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현실의 질서와 영혼의 수호로 은주의 안전을 도모하려는 그이기에 해가 지는 극지로서의 매곡에서 자긍심을 구하려 했다. 태양을 수납하여 보내드리는 의례를 통하여 은주의 의미를 확인하려 했던 것이다. 은주를 기점으로 하는 거리의 표시도 그 일환으로 보아야 한다.

그는 거리를「國代記」에서는「隱州-雲州美穗關」「隱州-伯州赤崎浦」「隱州-石州溫泉津」와 같이 은주를 기점으로 기록하는 방법으로 그 존재감을 확인하려 했다. 그리고 그 기점을「自雲州望隱州」라고,「은주」에서「운주」로 바꾼 다음에「이 주를 일본 서북의 경계로 한다(然則日本之乾地以此州爲限矣)」라고 표현하여 일본의 극지가「은주」임을 확인하여, 일본에서의 은주의 위치도 확인했다.

그러한 확인이「燒火山緣起」에서 재연된다. 저자는 신의 거주지라는 다쿠히산의 영험을 이야기하며, 그것에 대한 신뢰를 표하며 은주의 존재를 재확인하는데, 그것은「국대기」의 그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다른 것은「국대기」의 그것은 객관적이었으나 이곳에서는 신의 거주지라는 경관에 취했는지, 아니면 신에게 바치는 축문이라고 생각해서였는지 약간 흥분된 문장이라는 것이다.

운주․백주의 산들이 보인다. 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으나 개어 있으면 가리킬 정도로 선명하게 보인다. 아침의 광경과 저녁의 광경이 아름답게 변화한다. 서방을 보면 가로막을 것 같은 경계가 없고 바다가 한없이 훤하게 그저 광대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

이 다쿠히산을 기점으로 하는 기술은 은유적이기는 하나 사이고(西鄕)를 기점으로 하는「국대기」의 그것과 맥은 같다. 생략된 부분이 있는 것은 초출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비교하여 정리하면,「국대기」의 西向 남쪽 35리의 雲州 美穗關, 남동쪽 40리의 伯州 溫泉津, 남서쪽 58리의 石州의 溫泉津을 그저「雲州伯州之山」으로 기술하고, 남서쪽에 해당되는 부분은 생략했다. 그 대신 날씨에 따라 달라지는 가시의 상태를「희미하여 잘 보이지 않을 때도 있으나 개어 있으면 가리킬 정도로 선명하게 보인다」보인다고 첨가하였다. 다쿠히산에서 바라보는 남쪽 방향의 정경을 기록했다는 점에서, 비록 남서쪽은 생략했으나, 은주에서 바라 본 남쪽을 기록했다는 점에서는「국대기」의 그것과 잘 대응한다.

그에 비해 동서북에 대한 기록은 간과하기 쉬울 정도로 간단하다. 「국대기」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북동 방향(自子至卯)은 갈 곳이 없다(無可往地)라고 설명하고, 서북(戌亥) 방향에 있는 송도와 죽도까지의 거리를 일정으로 기록하였다. 그리고 그곳의 산물과 그것의 속명과 양도가 무인도라는 사실까지 설명했다.

그에 대응하는 다쿠히산 기점의 기록은 극히 간단하다. 아무것도 없다는 동북 방향은 생략하고 서방은「又無疆」으로 처리하고,「가로막을 것 같은 경계가 없고 바다가 한없이 훤하게 그저 광대하게 펼쳐져 있을 뿐이다」라고 설명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곳의「又」는 생략된 동북의 정경을 서에 포함시키는 표현으로 볼 수도 있다. 저자는 북서나 북동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다고 인식했기 때문에 북동에 대한 기록을 생략하고, 서방을 설명하면서「又」를 첨가하여 북동도 북서와 마찬가지라는 의미를 같이 표현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곳의「無疆」에는「국대기」의「북동」「북서」가 같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대기」는 북동에 갈 토지가 없는 것으로 기록하고, 이곳에서는 서방을「무강」으로 기록하였으므로, 그 방향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의 기록이라고 말할 지도 모르겠으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바로 뒤에 村川가 朱印을 받아 磯竹島로 도해했다는 기술이 있으므로 서방에「국대기」에서 언급한 송도와 죽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저자는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럼에도 서방을 강토가 없다는 無疆으로 기록한 것이다.

저자는 서북방에, 일본의 극지를 지난 저편에 송도와 죽도가 존재한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곳으로 가는 항로와 일정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 저자가 서방을「무강」으로 표현 한 것을 그곳에 존재하는 송도와 죽도의 존재를 부정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존재하는 것을 없다고 기술한 것은 자신이 관리하는 도서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저자가 관리하는 영지, 즉 은주에 속하는 영지가 없다는 표현으로 보아야 한다. 저자는 송도와 죽도를 일본의 영지로 인식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존재하는 섬은 있으나 일본의 영지는 없다는 인식에서「무강」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Ⅴ 결론

『은주시청합기』는 하나의 풍토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이 관심을 끌게 된 것은, 그것이 일본에 의해 한일 양국 간의 문제가 된 독도/죽도 문제를 해결해줄 수 있다고 믿은 일본이 그것을 역사적 자료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1667년의 기록이므로 한국의 기록에 비하면 한 없이 늦은 기록이지만, 한국 측의 기록은 믿을 것이 못된다며 마치 19세기말의 기년논쟁과 같은 주장을 펴는 인사들에 의해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현재도 그것을 근거로 역사적 소유를 주장하는 인사들이 더러 있다. 『삼국사기』이래 많은 기록들이 신라시대 이래의 소속을 밝혀주고 있음에도 기록들 간에 보이는 차이를 확대 해석하며 그 전체를 부정하려는 사람들이다.

『은주시청합기』에는「운주에서 은주를 보는 것」이「죽도에서 고려를 보는 것」과 같다.「그래서「此州를 일본 서북의 한계로 한다」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아무런 문제도 없는 극히 간단한 문장임에도 일본 측은「此州」가「죽도/울릉도」라며,「독도/죽도」가 일본령이라는 주장을 폈던 것이다. 그것은 전체적인 흐름에 의한 해석이 아니었기 때문에 일부분에 한정되는 해석을 가지고 끝없는 논쟁을 되풀이 할 수밖에 없는 문제제기였다.

그러는 사이에 기존의 방법을 강하게 부정하며 전체적인 맥락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시모조에 의해 제기되기도 했다. 사료비판을 하고 전체적인 흐름에 따라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논쟁에 큰 획을 그을 수도 있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전체란 필요한 부분을 이곳 저곳에서 모아, 목적하는 주장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많은 모순을 내포하고 사실까지 왜곡하는 방법으로 여러 사람에 의해 부정당하고 있어 이미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해 이케우치와 오니시는『은주시청합기』의 용어를 전체적으로 분석하여「차주」가 의미하는 것이「죽도」가 아니라「은주」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있다. 이케우치가「州」와「島」를 통계적으로 조사하고 문장 속에서의 역할을 통하여 규명한 것에 비해, 오니시는「州」와「島」의 음훈과 그것의 의미를 통해 밝히고 있다. 오니시는 명소 와카를 통해 저자의 인식을 확인하는 방법으로「차주」의 의미를 재확인하고 있다.

이로서 일본의 극지가 은주라는 것과「국대기」의「차주」가 은주를 가리킨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또 그것이 저자의 인식이었다. 그것은 저자가 서방을 보며 무강이라 한 것, 은주를 매곡의 땅으로 단정한 것 등으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 해서『은주시청합기』를 매개로 하는 독도문제가 해결 된 것은 아니다. 이케우치는「은기국이 일본 서북의 끝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이상 죽도/독도가 당시 일본의 판도에서 제외된 것이 된다라는 결론을 내린다. 그러면서도 그것이「조선령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것은 아니다」라는 여운을 남겼다.

『은주시청합기』에는「일본의 판도 외로 할 뿐이지, 죽도/독도가 조선의 영역에 속한다고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이 사료를 죽도/독도의 귀속을 나타내는 역사적 근거로 사용하는 것은 일한 양쪽 모두에게 적당하지 않아, 그러한 의론의 현장에서 사라져야할 것이다」라는 희망사항을 제시하기도 했다.

독도/죽도가 일본의 소유임을 증명해줄 것이라며 제기했던 기록, 일본의 역사적 소유를 입증한다고 제기했던 기록『은주시청합기』가 일본의 의도와는 달리 독도/죽도가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주는 기록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이 이야기하는 독도/송도의 소유는 자명해지는 일이 아닌가. 그것을 보다 확실하게 확인해 나가는 일이 연구자들에게 주어진 책무라 할 것이다.

















<abstract>


A Study of Eun-Joo See Chung Hab Ki and Tok-Do


Eun-Joo See Chung Hab Ki is only a topographic work. The reason why it draws our attention is that it has been presented as a historical data by Japan, which, she believed, could settle the issue of Tok-Do/Takeshima between Korea and Japan.

According to it, "to see Eun-Joo in Woon-Joo" is like "to see Koryeo in Takeshima/Wooleung-Do". There is also the statement "Therefore, Cha-Joo shall be a limit of Japan's Northwest". It is a simple sentence without any ambiguity but Japan asserted that Cha-Joo was Takeshima/Wooleung-Do and thus Tok-Do/Takeshima was a Japanese territory. That was not an interpretation based on a consideration of the flow of the whole context. It was a very limited interpretation of one part, which has consequently brought an endless arguments.

In the meantime, Ikeuchi and Onishi analyze the terminology in general and prove that "Cha-Joo" does not mean Takeshima but Eun-Joo. Ikeuchi makes a statistical survey of Joo「州」and Do 「島」and examines their functions in the sentences, while Onishi studies the sounds and significances of Joo and Do and their meanings. As a result, it becomes apparent that Keukchi in Japan refers to Eun-Joo and Cha-Joo in KookDaeKi indicates Eun-Joo. And also this is the author's recognition and intent, for the author, seeing the west, says there is no territory and he concludes Eun-Joo as the sun-setting land. Nevertheless, the Tok-Do issue related to Eun-Joo See Chung Hab Ki has not been settled yet. Observing that "Eunki Kuk is the end of Japan's Northwest", Ikeuchi concludes that the statement accordingly verifies Jook-Do/Tok-Do was excluded from the then Japanese maps. However, it does not mean, he adds, that Jook-Do/Tok-Do was not acknowledged as Chosun Dynasty's territory. According to him, Eun-Joo See Chung Hab Ki only says that it was not within the Japanese maps, but doesn't say Takeshima/Tok-Do belonged to Chosun's territory. Also, he has made a wish that "it is not appropriate that this document will be used as a historical evidence indicating the reversion of Tok-Do/Takeshima, and thus it should disappear from the scene of discussion.

Eun-Joo See Chung Hab Ki has been presented by Japan as a document to prove that Takeshima/Tok-Do would belong to Japan and also to demonstrate Japan's historical possession of it. Nevertheless, it, contrary to Japan's purpose, has become a document verifying that Tok-Do/Takeshima is not part of Japan's territory. The book tells its own true tale about the possession of Tok-Do/Takeshima. It is our duty to ascertain the truth clearly.


Key World

Eun-Joo See Chung Hab Ki, Tok-Do/Takeshima, Joo「州」and Do「島」,The end of Japan's Northwest, The possession of Tok-Do/Takeshima,Chosun Dynasty's terri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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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最終更新:2009-08-23 07:5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