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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谷九右衛門 竹島渡海由来記抜書控 안용복  
2008/09/12 11:22

http://blog.naver.com/kwonoyub/110035224100 
이 포스트를 보낸곳 ()


    大谷九右衛門

      竹島渡海由来記抜書控



【御由緒のあらまし】

一、私先祖之儀 元和田九右衛門尉良清与申者ニ而 故有テ但州大屋谷致蟄居 于時伯州會見郡尾高城主杉原播磨守殿 懇望直召ニ依 無余儀嫡孫玄番勝實 本苗ヲ秘シ地名ヲ取大谷玄[番]与号 加勢ニ差出候処 惜哉無程播磨守盛重公卒去 跡目論有 終ニハ断絶ニモ可及ニ付 暇乞捨再但州江引取 隠士与成 其后永禄年中 玄番長男和田九衛門勝宗ニ甥甚吉与申者有之 米子灘江引越住居為致 回船家業相営候処 越後国ヨリ帰帆之砌 与風竹島ヘ漂流 甚吉全ク島廻リ 越方等熱思致所 朝鮮国相隔事四拾里斗 人家更ニ無之 土産所務之品有之 姿弥渡海之勝手相考 同所ヨリ海上百五拾里斗 日経漸湊山下江帰帆 其頃因伯御太守新太郎様[御幼稚ニテ為御城代安倍四郎五郎様御越之砌 早速御注進申上之処 右甚吉儀江戸表ニ御召連御帰府被為在 則御詮議之上奉達]御上聞 元和四年竹島渡海御免之御奉書頂戴 同年ヨリ竹島渡海相始メ 凡七拾八年之間 無怠慢毎年渡海仕候 御公儀貢物上納ハ雖不仕ト 誠二空居之島 甚吉見顕日本之土地廣 御式帳戴之如抜群之功ト御称美 〈因茲二三年振又ハ八九年目ニ参勤〉公方様江独禮御目見ニ為仰付 其上御紋御時服御尉斗目拝領 竹島渡海之船江モ 御紋船印等拝領被為仰付 冥加之至 于時元禄九年竹島渡海御制禁被為仰出 家業失無是非 出雲国江立去願差出候処 御公儀江御由緒有之者 他国江引越参事御差留 追而被為思召在者 先ツ米子表魚魚問屋座口銭九右衛門一人為家録 可被為下置之旨 蒙仰[以]御蔭 于今至大谷家苗 米府相続仕 御公儀之御餘光故也 且享保三戌十二月廿七日夜 土蔵出火ニ而 拝領之品其外 代々江戸参府記録等 惜哉多分消失 尤于今所持之品々猶焼残之書記之内 為規模由緒之次第 拙家世代之座ニ書顕置者也



《現代語訳》 私の先祖のことを申し述べれば、元は和田九右衛門尉良清と申す者であります。とある理由があって、但馬国の大屋谷という所に、ひっそりと住んでおりました。この時、伯耆国會見郡の尾高城の城主であられた杉原播磨守〈盛重〉殿から、[仕官するように]直に懇望されました。[お断りすることもままならず]余儀なく嫡孫の玄番勝實を、本来の苗字を秘し[隠棲場所の]地名を取り、大谷(おおや)玄番(げんば)と号し、杉原殿の加勢に差し出し致しました。だが残念なことに、程なく播磨守盛重公は卒去されました。跡目の議論が有りましたが、あるいは断絶するかもしれないということで、暇(いとま)乞いをして仕官の道を捨てました。再び但馬国に引き戻り、隠棲の武士として過ごしておりました。

 その後、永禄年中(一五五八~七〇)、この玄番の長男で和田九衛門勝宗と、その甥の甚吉と申す者がいて、米子の灘に引っ越し。回船業を家業として相営み、暮らし始めました。ある時、越後国より帰帆の折、暴風に流され竹島へ漂着いたしました。[この航海を指揮していた]甚吉は、この島を一通り廻り[探索の末]今後のことを熟慮いたしました。ここは朝鮮国から四、五拾里も隔たった孤島でありました。人の住んでいる気配は有りません。島の産物は豊富で、価値ある品々が採取できます。そうなると島の様子をしっかりと捉え、この島へ渡海するための勝手(段取り)を考え始めました。そして日を措き、天候を見計らい、ようやく大山の麓、米子の湊へと帰って参りました。

 その頃、因幡国と伯耆国の御太守は、池田新太郎光政様でございました。まだ御幼少のため、米子城の御城代として阿倍四郎五郎様が米子の府に御越しの折、この島のことを御報告申し上げました。すると甚吉を江戸表へと召し連れ、帰府なさいました。つまり御上が、その詳細を甚吉から直接聞き取り、御詮議をなさるおつもりでございましたでしょう。いよいよ御上聞に達し、元和四年(一六一八)、竹島渡海の御免許の御奉書を頂戴いたすこととなりました。そして同年から竹島への渡海事業を始めました。おおよそ七拾八年の間、怠慢すること無く、毎年、渡海いたしました。

御公儀へ貢物の上納は致しておりませんが、空虚の島を甚吉が実際に発見し、日本の土地を広げ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とは、御式帳(目録)を戴くような栄誉であり、抜群の功績と御賞讃を得ることができました。この時から二、三年目、あるいは七、八年目に、出府参勤して[島の有様を]御報告することと相なりました。公方様へも独禮の御目見えを仰せ付けられ、その上、御紋(紋付きの衣服)御時服(時候に応じて着る衣服)御熨斗目(のしめ)(士分以上の者が着る礼服の小袖)などを拝領いたしました。竹島渡海の船へは、御紋の船印などを拝領いたし[渡航を]仰せ付けられました。まことに冥加の至りでございました。

だが元禄九年(一六九六)に至り、竹島への渡海の御禁制が仰せ出され[私どもは]家業を失うに至りました。どうしようもなく[この米子を出奔し]出雲国へ立ち去ろうと思い[藩庁へ]出立(しゅったつ)の願いを差し出しました。すると御公儀と関わる御由緒の有る者の家であるから、引っ越して他国へ参ることはならぬと、差し留められました。追って思し召しがあろうとの御趣旨を頂きました。

その御沙汰というのは、米子表において魚鳥問屋[として営業を許可するというもので]ございました。その問屋座の口銭は、九右衛門一人に家禄として与えるというものでございました。その旨を下し置かれ、仰せ蒙ったのでございます。御陰を以て今に至るのでございます。大谷家が米子の府において、苗字を伝え[代々に]相続を仕ることが出来たのは、まさに御公儀の御余光に依るものでございました。

享保三年(一七一八)戌の年、その十二月二十七日の夜、土蔵より出火するということがございました。御公儀より拝領いたした品々や、その他、また江戸参府の折の記録類などを、残念ながら数多く、焼亡させてしまいました。今、所持いたしております品々は、この時の焼け残りでございます。その焼け残った僅かな書き付けの記録からでも[御公儀との関わりが]どのような規模であったのか、どのような由緒であったのかが、分かってまいります。その[竹島渡航の]次第を、私どもの家を継いだ者、その代々の当主の座に有る者が[いかに行なってきたのかを]こうして[抜書控]として書き顕し、残しておくのでございます。





現代語訳》

나의 선조에 대한 것을 말씀드리자면 원래 和(와)田(다)九(큐)右(우)衛(에)門(몬)尉(죠우)良(요시)清(키요)라는 자입니다. 어떤 이유가 있어 但(타지)馬(마노)国(쿠니)의 大(오오)屋(야)谷(타니)라는 곳에서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이 때 伯(호우)耆(키노)国(쿠니) 會見郡

尾高城 성주이셨던 杉(스기)原(와라)播(하리)磨(마노)守(카미)〈盛(시게)重(모리)〉())殿(토노)한테서、[仕官(출근)하도록 하라고]직접 부탁받으셨다. [거절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기에]할 수없이 적손 玄(겐)番(반)勝(카쯔)實(자네)의 본래의 성씨를 감추고[은거하는 곳의]지명을 취하여, 오오야로 칭하며 스기와라를 도우러 내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얼마 지나지 않아 播(하리)磨(마노)守(카미)盛(모리)重(시게)公는 졸거하셨습니다. 후계의 의논이 있었습니다만, 어쩌면 단절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어서, 물러나 사관의 길을 버리셨습니다. 다시 但(타지)馬(마노)国(쿠니)로 돌아와 은거의 무사로 지내고 계셨습니다.

 그 후 永(에이)禄(로쿠) 연중(一五五八~七〇)에 이 겐바의 장남 和(와)田(다)九(큐)右(우)衛(에)門(몬)勝(카쯔)宗(무네)와 그 조카 甚(신)吉(키찌)라는 자가 있는데, 米(요나)子(고)의 灘(나다)로 이사했다. 해상운수업(回船業)을 가업으로 해서 운영하며, 살아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越(에찌)後(고노)国(쿠니)에서 귀범할 때, 폭풍에 만나 표류하여 죽도에 표착하였습니다. [이 항해를 지휘하고 있던]신키찌는 이 섬을 한 번 돌아 [탐색한 결과]금후의 일을 깊이 생각하셨습니다. 이곳은 조선에서 사오십리나 떨어진 고도였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는 없습니다. 섬의 산물은 풍부하여 가치있는 여러가지를 채취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섬의 상황을 자세히 조사하여, 이 섬에 도해하기 위한 상태(준비)를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천후를 살펴서 겨우 大(다이)山(센)의 산자락 요나고로 돌아왔습니다.

 그 무렵 因(이나)幡(바노)国(쿠니)와 伯(호우)耆(키노)国(쿠니)의 태수님은 池(이케)田(다)新(신)太(타)郎(로우)光(미쯔)政(마사)様(사마)였습니다. 아직 유소하시기 때문에 、米(요나)子(고)城(죠우)의 城(죠우)代(다이)님으로 阿(아)倍(베)四(시)郎(로우)五(고)郎(로우)様(사마)가 요나고府(후)(지방의 공공 단체)에 오셨을 때, 이 섬에 대한 것을 보고하여 드렸습니다. 그러자 신키찌를 에도로 데리고 돌아가셨습니다. 즉 주군이 그 상세한 것을 신키찌에게 직접 듣고 상의를 하실 계획이셨겠죠. 드디어 위에서 들으시고, 元(겐)和(나)四年(一六一八)에 죽도도해 면허의 봉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동년부터 죽도로의 도해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무려 칠십팔년간 태만하는 일 없이, 매년 도해하였습니다.

장군님에게 공물을 상납한 일은 없습니다만, 공허의 섬을 신키찌가 실제로 발견하여, 일본의 토지를 넓힐 수가 있었던 것은 、御式帳(목록)을 받는 것과 같은 영예이고, 발군의 공적이라고 칭찬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때부터 二、三년째 혹은 七、八年째에 출부 참근하여 [섬의 상황을]보고하게 되었습니다. 장군님에게도 독례로 알현할 것을 명받고, 그 위에 아 장군님도 독례로 알현할 것을 명받고, 그 위에, 御(오)紋(몬)(가문의 무늬)가 찍힌 의복, 지후쿠(장군이 하사하는 계절에 맞는 옷)고노시메(무가의 옷에 바쳐입는 예복) 등을 배령했습니다. 죽도로 도해하는 배에는 무늬를 넣은 배의 표시 등을 배령하여 [도항을]명받았습니다. 그야말로 신불이 도와주신 덕택입니다.

그러나 元(겐)禄(로쿠)九年(一六九六)에 이르러 죽도로의 도해를 금제하는 명이 내려 [우리들은]가업을 잃게 되었습니다. 어찌할 수 없어 [이 요나고를 떠나]出(이즈)雲(모노)国(쿠니)로 떠나려고 생각하고[번청에]출발하는 서류를 내었습니다.그러자 장군님과 관계되는 유서 깊은 자의 집이기 때문에, 이사하여 타국으로 가는 것은 안된다며, 잡혔습니다. 추후에 생각이 있을 것이라는 언질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이라는 것은 요나고에서의 어조도매상[으로서의 영업을 허가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매상의 구전은、큐우에몬 한 사람에게 가록으로 해서 준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을 내리시어, 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은혜를 입어 지금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大(오오)谷(야)家(케)가 요나고의 후에서, 성씨를 계승하여 [대대로]상속할 수 있엇던 것은 그야말로 장군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享(쿄우)保(호우)三年(一七一八)戌の年、그 십이월 이십칠일 밤에 토장에서 불이 나는 일이 있었습니다. 장군님한테 배령한 물품들이나 긍외로 에도에 참부했을 때의 기록 등을, 유감스럽게도 많은 것을 소실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소지하고 있는 것들은, 이때 타다 남은 것입니다. 그 타다남은 약간의 써두었던 기록에서도 [장군님과의 관계가]어떤 규모였는가, 어떤 유서였던 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죽도 도항의]사정을 우리들의 집을 이은 자, 그 대대의 장주의 자리에 앉은 자가 [어떻게 행하고 잇었는가를]이렇게 [발서공]으로 하여 써서 나타내어, 남겨두는 것입니다.







카미(守) 관청의 장관. 관청에 따라 卿, 督, 守, 頭,伯 등을 썼다.

죠우다이(城代)

註★、この「竹島渡海由来記抜書控」とは、竹島渡海事業の復活を図るため、大谷家が幕府へ提出した書類の中の一つである。第十一代の大谷九右衛門すなわち大谷勝意が、文政の頃、書き写したものと考えられている。此の他に「大谷家由緒実記」があり、また第十代の大谷九右衛門すなわち大谷勝長が書き残した「御公儀へ御訴訟並に竹島渡海の次第、先規より書付写し」がある。

주★、이「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은 죽도도해 사업의 부활을 도모하기 위해 오오야케가 막부에 제출한 서류의 하나다. 제십일대 오오야큐우에몬, 즉 오오야 카쯔노리가 文(분)政(세이) 시대에 서사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이 외에 「大(오오)谷(야)家(케)由(유이)緒(쇼)実(짓)記(키)」가 있고, 또 제십대의 오오야큐우에몬 즉 오오야勝(카쯔)長(나가)가 써서 남긴 「장군님에게 소송 및 죽도도해의 내용, 종래부터의 서사」가 있다.

註★、杉原盛重(一五三三~一五八一)戦国時代の武将、毛利氏の家臣、吉川元春の信任を受け、山陰地方を先鋒として転戦、活躍した。尼子討伐に功績あり、伯耆国尾高城(今の米子市尾高)を与えられる。盛重の死後、子の元盛・景盛の兄弟は家督をめぐって争う。その所領は吉川元春によって没収された。

杉(스기)原(와라)盛(모리)重(시게)(一五三三~一五八一)전국시대의 무장,毛(모우)利(리)씨의 가신, 吉(요시)川(카와)元(모토) 春(하루)의 신임을 받아 산인 지방을 선봉으로 전전하며 활약했다. 尼(아마)子(코) 토벌에 공적이 있어 호우키노쿠니 尾(오)高(타카)城(죠우)(지금 요나고시 尾高)를 받았다. 모리시게의 사후, 아들 元(모토)盛(모리)・景(카게)盛(모리) 형제는 가독을 둘러싸고 다툰다. 그 소령은 吉(요시)川(카와)元(모토) 春(하루)에 의해 몰수당했다.

註★、池田光政(一六〇九~八二)通称は新太郎、信長・秀吉・家康に仕えた池田輝政の嫡孫。元和三年より因伯両国を領する鳥取藩主となる。寛永九年、幕命によって因伯両国と備前国との国替えによって、備前国岡山藩主となる。

池(이케)田(다)光(미쯔)政(마사)(1609~820통칭은 新(신)太(타로)郎(우)、信(노부)長(나가)・秀(히데)吉(요시)・家(이에)康(야스)를 섬긴 池(이케)田(다)輝(테루)政(마사)의 적손. 元(겐)和(나)三年부터 因(인)伯(하쿠) 양국을 관리하는 藩(한)主(슈우)가 된다. 寛(칸)永(에이)九年에 막부의 명으로 因(인)伯(하쿠) 양국과 備(히)前(젠노)国(쿠니)를 교환하는 것에 의해 備(히)前(젠노)国(쿠니) 岡(오카)山(야마)藩(한)主(슈)가 된다.



註★、安倍四郎五郎正之(一五八四~一六五一)徳川秀忠に仕え、書院番、御使番を経て、大坂冬の陣・夏の陣に従軍、元和二年には御先弓の頭となる。以後は主に大名の改易転封の際の検使、大土木事業の奉行として活躍した。

安(아)倍(베)四(시)郎(로우)五(고)郎(로우)正(마사)之(유키)(一五八四~一六五一)徳(토쿠)川(가와)秀(히데)忠(타다)를 모시고, 경비 수호를 담당하는

書(쇼)院(인)番(반)、지방관을 감독하는 御(오)使(쯔카)番(이반)을 거쳐 大(오오)坂(사카)冬(후유)의 陣(진)・夏(나쯔)의 陣(진)에 종군하고,, 겐나 이년에는 御先弓の 頭가 된다. 이후에는 주로 大(다이)名(묘우)가 改易転封할 때의 検使、토목공사의 봉행으로 활약했다.



註★、大屋甚吉は勝宗の父の大谷玄番の甥という説もあるが、つまり勝宗の従兄弟である。この説は成立しない。・・・・・・・・・ということで、やはり勝宗の甥であると考える。

註★、大(오오)屋(야)甚(신)吉(키찌)는 勝(카쯔)宗(무네)의 부 大(오오)谷(야)玄(겐)番(바)의 조카라는 설도 있으나, 곧 카쯔무네의 종형제이다.

이 설은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것으로, 역시 카쯔무네의 조카라고 생각한다.

註★、玄番の隠棲の本質は、・・・・・・・・ということで、大屋川に沿う大屋谷は播州と但州を結ぶ主街道にあり、これは生野銀山を介する商業路である。日本海商路に繋がる交易の業、それが勝宗に受け継がれた。但馬を本拠として、杉原氏に仕えて以来の米子の拠点を、信頼する甚吉に任せていた。その先には石見銀山もある。そして但馬の後方には佐渡金山もある。つまり但馬と伯耆の海路交流の中に、大谷家の家業の本質がある。そしてその交易業は、石見や越後・佐渡にも、その船足を伸ばすものであった。さらには半島へまでも渡るものであった。

、겐바가 은거한 본거지는・・・・・・・・라는 것으로、大(오오)屋(야 )천을 따라 오오야 계곡은播(반)州(슈우)와 但(탄)州(슈우)를 연결하는 주가도에 있고, 이것은 生(이케)野(노) 은산을 사이에 둔 상업로다. 일본해 상로로 이어지는 교역업, 그것이 카쯔무네로 이어졌다. 但(타)馬(지마)를 본거로 하여 、杉(스기)原(와라)씨를 섬긴 이래 요나고의 거점을 신뢰하는 신키찌에게 맡기고 있다. 그 앞에는 石(이와)見(미) 은산도 있다. 그리고 타지마의 후방에는 佐(사)渡(도) 근산도 있다. 즉 타지마와 伯(호우)耆(키)의 해로 교류 중에 오오야케 본업의 본질이 있다. 그리고 그 교역업은 이와미나 越(에찌)後(고)・佐(사)渡(도)에도 그 뱃길을 넓힌 것이었다. 나가서는 반도까지 건너가게 되었다.



註★、先祖の和田九右衛門尉良清についても、若干、述べておこう。この人物は、・・・・・

선조 和(와)田(다)九(큐)右(우)衛(에)門(몬)尉(죠우)良(요시)清(키요)에 대해서도 약간 이야기 해두기로 한다. 이 인물은、・・・・・







【初代 九右衛門 勝宗】



於米子大谷家元祖是也 竹島渡海開祖ハ勝宗甥甚吉也 是者別記有之略候 尤竹島渡海村川差加ヘ由緒 勝宗故有 折節御城代江伺江 遂村川市兵衛儀茂由緒有之 於阿倍御館参會 于 時[阿倍公御取持ニ而 市兵衛連名及出願 尤勝宗名前差出可然之旨]阿倍公ヨリ御進メ雖有之ト 勝宗未タ再武之志有之故 達而御断 則阿倍公御帰国之節 市兵衛甚吉両人御召連 則江府相詰御訴訟申上 奉達御上聞 竹島渡海 不可有異議之旨 従御老中様御太守新太郎様江 以御奉書被為仰出 右御達書頂戴仕 則元和四年ヨリ渡海発ル 是ハ別記有之略候 如前記勝宗隠士 再武志有之 故発願ヨリ甥甚吉名前ニ而有之処 惜哉甚吉於竹島ニ病死致シ 暫ク懈怠無余処 勝宗但州ヨリ家族共引移 渡海之処相務候事 尤本苗之和田ハ勿論 中古ノ大谷姓迄茂秘シ 甥ノ甚吉同様大屋九右衛門ニ而 継目仕 因茲竹島江渡海之由緒者勝宗 於御公儀者二代目相当ル 甚吉他姓ノ人ニ而モ無之 尤嫡流不有之外戚等 是者別記有略之



《現代語訳》 米子における大谷家の元祖は、この九右衛門勝宗でございます。また竹島渡海の開祖は、勝宗の甥の甚吉であります。[互いの関係の]詳細は別記にございますので省略いたします。

 竹島渡海に村川氏が差し加わった事情は、勝宗に少々理由がございました。御城代様に伺い出る折、急遽、村川市兵衛も参加することとなりました。村川にも若干の理由のあることでございました。阿倍様の御館にて参会した折、市兵衛との連名で[竹島渡海を]相願いに及ぶよう、阿倍様の直々の御取持がございました。大谷九右衛門勝宗の名前を差し加え[書面を差し出すようにとの]然るべき旨の阿倍様の御進めでございました。それを有り難く思いは致しましたが、勝宗はなお再び武士に戻る志がございましたから[商人としての立場で書面を提出することを]敢えて御断り致したのでございます。だから阿倍様が[関東へ]御帰国の折[勝宗と市兵衛とではなく]市兵衛と甚吉の両人を御召し連れになられました。

江戸表に至り[御公儀に]相詰めて[竹島渡海の御許可を頂きたいと]御訴訟(請願)を申し上げました。それが御上聞に達したのでございます。竹島渡海に異議は無い[許可を与える]と、そのような旨のお達しがあり、御老中様より因幡国伯耆国の御太守たる新太郎(池田光政)様へ、御奉書を以て[その御許可の]仰せがございました。右の御奉書を頂戴仕り、それによって元和四年から[竹島への]渡海が始まったのでございます。詳しくは別記にございますので、これを省略いたします。

 前記の如く、勝宗は隠棲の武士でございました。再び武士として世に立つ志がありましたから、甥の甚吉の名前にて[竹島渡海の]御請願を発しておりました。だが残念ながら、甚吉は竹島に於いて病死するに至り[その渡海事業は]暫く懈怠いたしました。やむを得ず勝宗は、但州(但馬)から家族どもを引き連れ[米子へと移住し]渡海の事業を相務めることと致しました。もっとも本来の苗字である和田を名乗ることは無く、もちろん中古以来の大谷の姓までも秘し、甚吉と同様の大屋の名を用いました。大屋九右衛門と称して、米子での事業を引き継いだのでございます。こうして竹島の由緒[の一切]は、勝宗の下に寄着するところとなりました。御公儀は二代目の[徳川秀忠公の]御代に相当する時代でございました。甚吉は他の姓ではございません。大屋の家のものでございます。しかも跡を継ぐべき者もおらず[結局、大屋九右衛門が継いだのでございます。]外戚等の存在は、別記に詳細がございますので、略させていただきます。

요나고에서의 大(오오)谷(야)家(케)의 원조는 이 九(큐)右(우)衛(에)門(몬)勝(카쯔)宗(무네)입니다. 또 죽도도해의 개조는 카쯔무네의 조카 甚(신)吉(키찌)입니다. [상호간의 관계에 관한]상세한 것은 별기이기 때문에 생략합니다.

 죽도도헤에 村(무라)川(카와)씨가 찬가하게 된 사정은 카쯔무네에게 약간 사정이 있었습니다. 御(고)城(죠우)代(다이)様(사마)를 뵈러 가는 길에, 급거 村(무라)川(카와)市(이찌)兵(베)衛(에)도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무라카와에게도 약간의 이유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阿(아)倍(베)님의 저택에 찾아갔을 때, 이찌베에와의 연명으로 [죽도도해를]원하게 되어, 아베님의 주선이 있었습니다. 大(오오)谷(야)九(큐)右(우)衛(에)門(몬)勝(카쯔)宗(무네)의 이름을 첨가하여[서면을 제출하도록 하라는]그러한 아베님의 권유였습니다. 그것을 감사하게 생각하였습니다만, 카쯔무네는 아직도 다시 무사로 돌아가려는 뜻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상인이라는 입장에서 서면을 제출하는 것을]일부러 거절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아베님이 [관동으로]귀국하실 때[카쯔무네와 이찌베에가 아니라]이찌베에와 신키찌 양인의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에도에 이르어 [막부에서]대기하며 [죽도도해의 허가를 받고 싶다고]소송(청원)을 올렸습니다. 그것이 위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죽도 도해에 이의는 없다[허가한다]라고, 그러한 내용의 통지가 있고, 御(오)老(로우)中(쥬우)様(사마)가 因(이아)幡(바)国(호우)伯(키노)耆(쿠니)国의 태수 新(신)太(타)郎(로우)(池(이케)田(다)光(미쯔)政(마사))님에게、봉서로 [그 허가의]말씀이 있었습니다. 우의 봉서를 받아 그것에 의해 겐나4년부터 [죽도의]어로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자세한 것은 별기에 있으므로。 이것을 생략합니다.

 전기와 같이 카쯔무네는 무사였습니다.다시 무사로 입세하려는 뚯이 있었으므로, 조카 신키찌의 이름으로 [죽도 도해의]청원을 내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신키찌는 죽도에서 병사하게 되어[그 도해사업은]잠시 소홀했습니다.어쩔 수 없이 카쯔무네는 但(탄)州(슈우)(但(타지)馬(마))에서 가족을 모도 대리고 [요나고로 이주하여]도해사업에 근무하기로 하였습니다. 당연히 원래의 성씨인 和(와)田(다)를 내세우지 않고, 신키찌와 마찬가지로 오오야라는 이름을 사용했습니다. 大(오오)屋(야)九(큐)右(우)衛(에)門(몬)으로 칭하고, 요나고에서의 사업을 이어받았던 것입니다. 이라하여 죽도 유서[의 일체]는 카쯔무네로 기착하는 것이 됩니다. 장군님은 2대째인[徳(토쿠)川(카와)秀(히데)忠(타다)공의]시대에 해당하는 때였습니다. 신키찌는

타른 성씨가 아닙니다. 오오야케의 사람입니다. 그것도 뒤를 이을 자가 없어 [결국 오오야큐우에몬이 계승한 것입니다]외척 등의 존재는 별기에 자세한 것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겠습니다.





註★、大(오오)屋(야)九(큐)右(우)衛(에)門(몬)勝(카쯔)宗(무네)

註★、大屋甚吉の死去の年月日は不明である。大谷家の家譜は、一応、暫定的に竹島渡海御免の元和四年五月十六日を命日と定めているが、この御免の御奉書は老中の連署名からして元和八年以降のものである。その中に明らかに甚吉の名前が記されているから、甚吉の死去は、まだその後である。

大(오오)屋(야)甚(신)吉(키찌)가 사거한 년월일은 불명이다. 大(오오)谷(야)家(케)의 가보는 일단 잠정적으로 죽도도해면허를 겐나 4년 5월 16일을 명받은 날로 정하고 있으나, 이 면허의 봉서는 노중의 연서명으로 보아 겐나 8년 이후의 것이다. 그 속에 분명히 신키찌의 이름이 기록되어있으므로, 신키찌 사거도 역시 그 후이다.



 大屋甚吉については『大谷家古文書』の系図に、「玄番の甥なり、玄番の二児を守り伯耆米子にて廻船業をおこし、竹島を発見開発す。竹島に没」とある。玄番の子である勝宗は寛文二年(一六六二)九十七才にて死去している。だから元和四年の竹島渡海の折、勝宗は五十三才である。船頭して船を操り渡航するような人物は、もって若くなくては勤まらない。甚吉は、勝宗よりも相当若かった筈である。当然、勝宗の甥である。またその竹島渡海も、若年の甚吉の才覚では、行える筈もない。老獪な勝宗が真のプロモーターなのであった。

오오야신키찌에 대해서는 『오오야家(케)古(코)文(몬)書(죠)』의 계보에 「玄(겐)番(바)의 조카다. 겐바의 두 아이를 수호하여 伯(호우)耆(키)米(요나)子(고)에서 회선업을 일으켜, 죽도를 개발하다. 죽도에서 몰하다」라고 있다.겐바의 아들인 勝(카쯔)宗(무네)は寛(칸)文(분) 2년(一六六二)97세로 사거하고 있다.그러므로 겐나 4년에 죽도에 도해했을 때, 카쯔무네는 53세였다. 선두로서 배를 저어 도항할 수 있는 인물은 원래 젊지 않으면 안된다. 신키찌는 카쯔무네보다 상당히 젊었기 마련이다.당연히 카쯔무네의 조카다. 또 그 죽도도해도 약년의 신키찌의 재각으로는 행했을 리도 없다. 노회한 카쯔무네가 진짜 실행자였던 것이다.。



註★、村(무라)川(카와)市(이찌)兵(베)衛(에)







寛永十五年西之御丸 御材木御用被為仰付 難有奉畏入 寅二月右御用木為献上 市兵衛九右衛門両人共参府 則御目見被為仰付 首尾能相勤 両人共御時服奉拝領仕 頃者乍恐御三代目之御将軍様御代之御事 並ニ西御丸御書院御床板御書棚等之御用 相勤候ニ付 道中[御紋之]御符験 御指札奉蒙御免 于今所持仕候事



     阿倍四郎五郎様 人々中           忠勝

昨日者伯耆国町人大屋九右衛門 私宅江参候付 御使被指添候 右之九右衛門儀 竹島江船渡候旨 此頃罷帰候 例公方様江御目見仕候由 令得其意候 随而貴殿儀炎天之節 毎日御普請場江御出候処 御太儀存事候 何茂期面上之節候 恐惶謹言

     八月十五日              酒井讃岐守忠勝  御在判

《現代語訳》 寛永十五年(一六三八)のことでございました。[江戸城]西の御丸[修復工事に]御材木を用立てるよう仰せ付けられました。有り難き幸せと畏(かしこ)み入り、その寅年の二月、右の御用木を献上する為、市兵衛と九右衛門の両人とも参府致しました。御目見を仰せ付けられ、首尾良く相勤め、両人とも御時服を拝領致しました。その御仕えを致しましたのは、恐れ乍ら御三代目の将軍様[徳川家光公]の御代の事でございました。西の御丸や御書院の御床板や御書棚などの御用を相勤めますゆえ、それに付いての[海路]道中の御符験や御指札を頂き[通航の]御免を蒙った次第でございました。その[御下賜品を]今も所持致しております。

寛(칸)永(에이) 15년(一六三八)의 일이었습니다.[江(에)戸(도)성]西(니시)の(노)御(온)丸(마루)[수복공사에]제목을 제공하도록 명령받았습니다. 고맙고 영광스런 일이라고 황송하게, 그 인년 2월에 필요한 재목을 헌상하기 위해 市(이찌)兵(베)衛(에)와 九(큐)右(우)衛(에)門(몬) 두 사람 모두 참부하였습니다. 알현을 명받아 차질없이、근무하고 두 사람 모두 계저의 의복을 배령하였습니다. 그 일을 한 것은 황송스럽게 3대의 장군님 [徳(토쿠)川(가와)家(이에)光(미쯔)공]의 어대의 일이었습니다. 西(니시)の(노)御(온)丸(마루)나 서원의 바닥판자나 책장 등의 필요에 따라 일하기 때문에,、그것을 위한 [해로]도중에는 그것을 증명한다는 符(후)験(켄)이나 指(시)札(레이)를 받아 [통항의]허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 [하사품을]지금도 소지하고 있습니다.







御書簡の写し〉  西の御丸の御普請の頃、酒井忠勝から阿倍四郎五郎への書簡

     阿倍四郎五郎様 御家中へ       

昨日は伯耆国の町人大屋九右衛門が私宅へ参り、御使の品を指し添えられました。右の九右衛門は竹島へ船で渡り、近頃、罷り帰ってきたようでございます。例の公方様への御目見得も仕ったようで[一代の誇りとして、大いに]其の意が得られたようでございます。そのような折のまにまに御貴殿は、この炎天の中、毎日、御普請場にお出掛けになられる由[九右衛門から聞きました。]まことに御大儀に在じ上げます。いずれまた折あれば対面の上、御礼を申し上げます。恐惶謹言

     八月十五日            酒井讃岐守忠勝 御在判

〈서간의 사본〉 니시노오마루의 普(후)請(신)(토목공사)의 항, 酒(사카)井(이)忠(타다)勝(카쯔)가 阿(아)倍(베)四(시)郎(로우)五(고)郎(로우)에게 보내는 서간

     阿(아)倍(베)四(시)郎(로우)五(고)郎(로우)様(사마) 御家中에게       

어제는 호우키노쿠니의 사람 오오야큐우에몬이 우리집에 와, 사용할 것을 갖추었습니다. 우의 큐우에몬은 죽도로 배로 건넜갔다, 최근에 돌아온 것 같습니다. 그 장군님의 알현도 있었던 것 같아, [일생일대의 자랑으로 여기며, 크게]그 뜻을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그러한 때에, 귀하는, 이 염천 속에 매일 토목공사장에 나가신다는 이야기, [큐우에몬한테 들었습니다]참으로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또 기회가 있으면 뵙고 인사드리겠습니다. 삼가 아룁니다

     8월 15일            酒(사카)井(이)讃(사누)岐(키노)守(카미)忠(타다)勝(카쯔) 御在判









〈죽도도해면허 봉서의 사본〉

従伯耆国米子竹島江 先年船相渡之由候 然者如其今度致渡海度之段 米子町人村川市兵衛

大屋甚吉 申上付而 達上聞候之処 不可有異議之旨 被仰出候間 被得其意 渡海之儀可 被

仰付候 恐々謹言

      五月十六日 

 

             永井信濃守尚政

               井上主計頭正就

                土井大炊頭利勝

                酒井雅楽頭忠世



伯耆国の米子より竹島へ、先の年から船舶渡航の由がある。然らば其のように、今度もまた渡海致したいとの段を、米子町人の村川市兵衛と大屋甚吉とが申し上げてきた。そのことに付き[評定したが]これが上聞に達し[渡海の]儀は異の有るところでは無いとの仰せが出された。其の御意向が得られたによって、渡海の儀は可と仰せ付けられるにいたった。恐れながら、このことを謹んで申し上げる。



    五月十六日             永井信濃守尚政

                      井上主計頭正就

                      土井大炊頭利勝

                      酒井雅楽頭忠世

    松平新太郎殿



〈죽도도해허가의 봉서 사본〉

호우키노쿠니의 요나고에서 죽도로, 선년부터 선박 도항의 일이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이번에도 또 도해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요나고 정인 무라카와이찌베에와 오오야신키찌가 신청해 왔습니다. 그 일에 대해 [평정했으나]이것이 장군에게 알려져[도해의]건은 이의가 없다는 명이 내렸습니다. 그 뜻을 얻을 수 있었기에, 도해의 건은 가능하다고 말씀할 수 있게 되었다. 감히 이 일을 삼가 아룁니다.



    5월 16일            나가이시나노노카미 나오마사

                      이노우에카즈에노카미마사나리

                      도이오오이노카미토시카쯔

                      사카이우타노카미타다요

    마쯔타이라신타로우



註★、酒井讃岐守忠勝 

註★、永井信濃守尚政

註★、井上主計頭正就

註★、土井大炊頭利勝

註★、酒井雅楽頭忠世





右勝宗江戸参府 御目見之年番候処 同人及老衰 殊更眼病ニ付 嫡子惣助為致参府事 于時御目見当日相成 前髪ニ而ハ御例無之 俄於御殿中蘇鉄之御間 安倍公御差図ヲ以 惣助元服

名九右衛門ト改号 御目見首尾能相勤 罷帰候節 安倍公ヨリ勝宗江 被下候御書面 左書顕置也



卯月三日之来札披見 今度惣助罷下 遂面談候処 其方達者候得共 眼病癒無之由申候付 此

度元服為致 九右衛門与名改 御老中江茂差出至 廿八日首尾能致御目見候間 難有儀大慶可有之候 委細ハ惣助可為演説候 且又下緒壱具贈給 欣然之至候 我等儀モ一段父子共無事在候間 可御心安候 竹島江之用事 惣助ニ書付申談候 猶期後音候 恐々謹言

     六月二日                安倍四郎五郎政重 在判

      大屋九右衛門様

猶以惣助於茲元 代々之名九右衛門ト申上候間 其方名ヲ替 緩々与休息 可然委細者惣助ニ

申含候 以上



四月三日之一翰 令披見候 然者貴殿儀病気ニ付而 為名代同姓惣助御下候 同苗四郎五郎肝

煎ニ而 首尾能御目見江被仕候間 可有恐悦候 随而下緒大小壱具贈給 忝存候 将又我等一

類共 堅固相勤候 猶期後音之時候 恐々謹言

     五月晦日               安倍忠右衛門正義 在判

      大屋九右衛門様

             御返事

猶々惣助儀 生付能御手前仕合ト 我等兄弟共寄合申事候 可有御満足候 以上



正月八日 前紙之御状令披見候 去冬首尾能公方様江御目見 難有被仕存候旨尤候 我等儀モ

弥無事在之事候 来春竹島江船被為相渡候旨 無事着岸之左右可承候 材木之儀 両人江之書

状申遣候 次重而者子息御目見ニ可被指越之由令承候 一段可然候 無気遣御越可有之候 猶

期後音候 恐々謹言

     正月晦日               安倍四郎五郎政重 書判

    大屋九右衛門様

          御返報



《現代語訳》

 右の勝宗は江戸に参府し[公方様の]御目見得に預かる栄誉の年番となっていました。ですが同人は年老いて弱り、殊に眼病を患い[もう旅道中に耐えられません。]そこで嫡子の惣助を参府致させることになりました。時は到り、いよいよ御目見得の当日に相成りました。惣助は[まだ前髪の少年でした。御目見に預かる者で、これまで]前髪の少年という前例はありません。そこで急遽、阿倍公の御差図にて御殿の中の蘇鉄の間にて、惣助は[前髪を落とし]元服を致しました。そして九右衛門と号し、改名致しました。御目見得も首尾よく相勤め、いよいよ故郷に帰る段となった時、阿倍公から勝宗に宛てて御下しになった書面がございます。左に書き顕してございます。



우의 카쯔무네는 에도에 참부하여 [장군님을] 알현할 수 있는 영예로운 년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동인은 나이가 들고 노쇠하여, 특히 눈병을 알아 [도저히 여행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적자 소우스케를 참부시키기로 했습니다. 때가 되어 드디어 알현하는 당일이 되었습니다. 소우스케는 [아직 관례를 올리기 전의 소년이었다. 알현을 하는 자로 지금까지] 관례 전의 소년은 전례가 없습니다. 그래서 급거 아베공의 지시로 어전 안의 소우테쯔 사이에서, 소우스케는 [앞머리를자르고] 관례를 치렀습니다. 그리고 큐우에몬이라는 이름으로 개명했습니다. 알현도 순조롭게 치르고, 드디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 아베공이 카쯔무네 앞으로 주신 서면이 있습니다. 좌에 옮겨 써서 나타냅니다.



〈御書簡の一〉

 卯月(陰暦四月)三日の御書簡を拝読。この度、惣助が江戸に罷り下り、遂に[その惣助と]面談を果たした。其の方も達者ではあるようだが、眼病を患い、癒えることは無いと申していた。この度、元服を致させ九右衛門と改名し、御老中へも御報告を差し上げた。二十八日には[公方様へ]首尾良く御目見得を果たし、有り難きことと、大慶に存ずる次第である。その折の委細は惣助が自ら貴殿に演説することであろう。且つまた下げ緒(腰刀)の一式を御寄贈給わり、欣然の到りである。我等も、また一段と、父子ともども無事に過ごしている、御心を安んじていただきたい。竹島への用事、惣助に書付を申し渡し[その要件を]語っておいた。猶、申し残した事は次の便りに譲ることとする。恐々謹言。

    六月二日             阿倍四郎五郎政重  在判

      大屋九右衛門様

[追伸]猶、惣助を以て、そこもとの代々の名、九右衛門を名乗らせ[御公儀に]申し上げた。従って貴殿は名を替え[隠居の身と成り、今後は]緩々と休息の日々を過ごされたし。然るべき委細は、惣助に申し含めてある。以上。



4월 3일에 온 서간을 보았습니다. 이번에 소우스케가 오셔서 드디어 [그 소우스케와] 면담을 했습니다. 그 분도 건강하기는 하지만, 눈병을 앓아, 낫지 않는다 했습니다. 이번에 겐푸구하고 큐우에몬으로 개명하여 노중에게도 보고드혔다. 28일에는 [장군님에게] 순조롭게 알현을 마쳐, 고마운 일이라고, 아주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 때의 자세한 상황은 소우스케 스스로 귀하에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아래매듭[요도] 한 벌을 기증받은 것 흔연하게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더욱더 부자 모두 무사히 지내고 있다. 안심하여 주세요. 죽도에 관한 건은 소우스케에게 서부를 건네 [그 용건을] 이야기 해두었다. 또 남은 이야기는 다음 편지로 미루기로 한다. 삼가 말씀 드립니다.

   6월 2일                               아베시로우고로우 재판 

   오오야큐우에몬 사마



[추신] 또 소우스케를 통해 당신의 대대의 이름으로, 큐우에몬을 이름하게 하여, [장군님에게] 아뢰었다. 따라서 귀하는 이름을 바꾸어 [은거하고, 금후로는] 편하게 휴식을 취하며 지내세요. 그 자세한 것은 소우스케에게 말해두었다. 이상.



〈御書簡の二〉

 四月三日の御書簡、拝見させていただいた。それによれば御貴殿は病気の由、そのため名代(みょうだい)として御家名を名乗る[嫡子]惣助を下された。我が一族の四郎五郎の肝煎(きもい)りにて[その御嫡子も]首尾良く御目見得を勤められた。まことに恐悦至極に存ずる。そのような折の随(まにま)に、下げ緒(腰刀)一式を御恵贈あり、忝なく存ずる次第である。まさに我等一族は、また堅く結び付き、今後も御奉公を相勤めるつもりである。[だから今後も何かと力になれるであろう。頼りとするがよい。]猶、申し残したことは、次の頼りに譲ることとする。恐々謹言。

    五月晦日             阿倍忠右衛門正義  在判

      大屋九右衛門様への御返事に

[追伸]猶々、惣助の儀に付いて申し述べれば[御子息の惣助は]生来の利口者であり[父である]貴方は実に幸せ者である。そのように我等兄弟は寄り合えば話し合っている。さぞやご満足であろう。以上



4월 3일의 서간을 배견하였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귀하는 병 때문에, 그 때문에 대리인으로 가명을 대표하는 [적자] 소우스케를 보내셨다. 우리 일족의 시로우고로우의 주선으로 [그 적자도] 순조롭게 알현할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기쁘기 그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때에 아래끈(요도의) 한 벌을 고맙게 보내주어 고맙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우리 일족은 역시 굳게 결속하여, 금후에도 봉공할 생각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무슨 일이든 하게 될 것입니다. 믿으셔도 됩니다] 또 남은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한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5월 그믐                   아베타다에몬마사시게  재판



    오오야큐우에몬 사마에게 보내는 답장

[추신] 또 소우스케의 건에 대해 말하자면 [아드님 소우스케는] 천생 영리한자여서 [부인] 당신은 참으로 행복한 자이다. 그렇게 우리 형제들이 모이면 이야기하고 있다. 필시 기뻐하시겠지요. 이상.



〈御書簡の三〉

 正月八日の御書簡、拝見させていただいた。昨年冬には、首尾良く公方様への御目見得を果たされた。有り難き仕合わせとお考えになったのも、もっともなことである。我等も、いよいよ無事にて[日々御奉公に]勤めている。来春、竹島へ渡船を致されるとの由、無事、着岸の首尾を承りたいものである。材木の件は、両人への書状に申し遣わしてあり[それを御参照ありたし。]次に重ねて、御子息の御目見得についてであるが、名指しで語り越される程のものであった。御承知おき下さるように。一段としかるべき[晴れやかなものであった]と存ずる。また、お気遣いなく[当方へ便りを]御越し下さるように。猶、申し残したことは、次の頼りに譲ることとする。恐々謹言。

    正月晦日             阿倍四郎五郎政重  書判

     大屋九右衛門様への御返報



정월 8일 전의 서간을 배견하였습니다. 작년 겨울에는 순조롭게 장군님의 알현을

마쳤습니다.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신 것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들도 그야말로

무사하게 [매일 매일의 봉공에] 근무하고 있다. 오는 봄에 죽도에 도선한다는

이야기, 무사히, 착안의 시말을 듣고 싶은 것입니다. 재목의 건은 양인의 서장에

말해두었으니 [그것을 참조할 것] 그리고 거듭 아드님의 알현에 대한 것이나, 지

명하며 말씀하실 정도의 일이었다. 잘 알아 두시도록. 한 결 그 같은 [성대한 것

이었다]고 생각한다. 또 가벼운 마음으로 [이 쪽에 연락을] 주시도록. 그리고 남

은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하겠습니다. 삼가 말씀드립니다.

정월 그믐 아베시로우고로우 마사요시 서판

 오오야큐우에몬 사마에게 보내는 답장



註★、阿倍四郎五郎政重

註★、阿倍忠右衛門正義











【二代 九右衛門 勝實】



勝實幼名惣助 於江府九右衛門与改名 及老来隠居シ瀬兵衛ト改 此惣助若年之時 父勝宗為名代江府江詰 前記如ク首尾能御目見仕 其後数度御目見仕 則参府致段 記録有之処焼失 尤寛文十一年亥五月廿八日御目見仕 並ニ延宝七年未七月参府 其翌八月御目見仕 右両度分献上之品 並ニ御役人様勤門控 左之通書顕 猶延宝九年酉七月 村川市兵衛参府之節 御達書ニモ顕然タリ

寛文十一年亥五月廿八日 御目見仕砌 御勤門 左之通



   御公方様江献上箱肴   但 例之通 竹島鮑 五百貝一折

      酒井雅楽守様

      酒井河内守様

      阿部豊後守様

      稲葉美濃守様

      久世大和守様

      土屋但馬守様

      板倉内膳守様

   右御七人様江竹島鮑五百貝入一折宛

      土井能登守様

      堀田備中守様

   右若御老中江竹島鮑三百貝入一折宛

      小笠原山城守様

      戸田伊賀守様

      本多長門守様

   右遠国御奉行江竹島鮑三百貝入一折宛

右寛文十一年亥五月廿八日勝實御目見仕候砌勤門控



《現代語訳》

 勝實の幼名は惣助でございます。江戸に於いて九右衛門と改名致しました。また老いて隠居致した折には、また瀬兵衛と改めました。此の惣助は若年の時、父の勝宗の名代として江戸に詰めることがございました。前記の如く首尾良く公方様の御目見得を仕り、其の後も、数度の御目見得を仕りました。だから参府の折の記録類なども[数多く有りましたが、その後の]火災によって[多くを]消失致しました。もっとも寛文十一年(一六七一)戌の年、五月二十八日の御目見得を仕ったことや、延宝七年(一六七九)未の年、七月に参府し翌八月に御目見得を仕ったこと、その両度の分の記録はございます。献上の品、並びに勤門に在った御役人様方の控えがございます。左の通りに書き顕してございます。なお延宝九年(一六八一)酉の年、七月には村川市兵衛が参府致しました。その折の御達書にも[大谷家の御目見得の件が]顕かに記してございます。

 寛文十一年(一六七一)亥の年の五月二十八日、御目見得を仕る折、御勤門[の皆様への献上は]左の通りでございます。



카쯔사네의 유명은 소우스케입니다. 에도에서 큐우에몬으로 개호하였습니다. 또 노년에 은거하였을 때는 다시 세베에라고 고쳤다. 이 소우스케는 젊었을 때, 아버지 카쯔무네를 대신하여(묘우다이로) 에도 막부에 거주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전기한 것처럼 순조롭게 장군님을 알현하고, 그 후에도 수회 알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참부할 때의 기록류 등도 [수 많이 있었습니다만, 그 후의] 화재로 소실하였습니다. 칸분 11년(1671) 술년, 5월 28일에 알현한 일이나, 엔보우 7년(1679) 미년 7월에 참부하여, 다음 8월에 알현한 일, 그 두 번의 기록은 있습니다. 헌상품 및 관인들의 메모가 있습니다. 좌와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엔호우 9년(1681) 유년 7월에 무라카와이찌베에가 참부하였습니다. 그 때에 바친 서에도 [오오야케가 알현한 건이]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칸분 11년(1671) 해년 5월 28일에 알현할 때 근무하던 [모든 분들에 대한 헌상은] 좌에 드는 것과 같습니다.



    御公方様への献上箱の肴 但し例の通りの竹島蚫五百貝一折を献上

        酒井雅楽紙様

        酒井河内守様

        阿部豊後守様

        稲葉美濃守様

        久世大和守様

        土屋但馬守様

        板倉内膳守様

      右御七人様へ竹島蚫五百貝入一折宛を贈呈

        土井能登守様

        堀田備中守様

      右若御老中へ竹島蚫三百貝入一折宛を贈呈

        小笠原山城守様

        戸田伊賀守様

        本多長門守様

      右遠国御奉行へ竹島蚫三百貝入一折宛を贈呈

 右は寛文十一年(一六七一)亥の年、五月二十八日、勝實が御目見得を仕った折、その勤門の控えでございます。



장군에게 헌상한 상자 고기. 단 그전과 마찬가지로 타케시마 전복은 500패 일절.

                 사카이우타노카미 사마                   동 카와찌노카미  사마

아베분고노카미 사마                  이나바미노노카미 사마

히사요야마토노카미 사마             쯔찌야타지마노카미 사마

이타쿠라나이센노카미 사마    

우 일곱 분에게 타케시마 전복 500패입 1절씩

              토이노토노카미 사마                    홋타히쥬우노카미 사마

         우 젊은 노중에게 타케시마 전복 300패입 일절씩 

카사와라야마시로노카미 사마 토다이가노카미 사마

혼다나가토노카미 사마

우 원국 부교에게 타케시마 전복 300패입 일절씩

우는 칸문 11년(1671) 해년 5월 28일에 카쯔사네가 알현했을 때, 그 근문의

메모입니다.



註★、酒井雅楽守様

註★、酒井河内守様

註★、阿部豊後守様

註★、稲葉美濃守様

註★、久世大和守様

註★、土屋但馬守様

註★、板倉内膳守様

註★、土井能登守様

註★、堀田備中守様

註★、小笠原山城守様

註★、戸田伊賀守様

註★、本多長門守様







一、竹島渡海中開発 甚吉ヨリ勝宗勝實勝信四代 各数度御目見仕候節 記録有之処 享保三年戌十二月廿七日 土蔵出火之節 多分焼失 尤相残分 左ニ書顕置者也



御目見御式次第御目録書

     五月廿八日

一、如例月御礼相済

    参勤之御礼

        綿弐百抱金馬代   松平肥前守

        綿 百抱金馬代   松平主殿守

        蝋燭五箱金馬代   松平筑前守

  一、上杉弾正大弼在着ニ付 以使者 蝋燭五箱ニ種一荷被差上候

使者銀馬代ヲ以自分之御礼

色部又四郎終而御次之間伺

公之面々並内縁ニ而

伯耆国米子町人参上  箱肴   大谷九右衛門

右終而 入御



一、勝實延宝七年未七月参府 其翌八月御目見被仰付候 左之通

   御公方様江献上  竹島鮑五百貝入 一折

      酒井雅楽守様

      酒井河内守様

      稲葉美濃守様

      大久保加賀守様

      土井能登守様

      堀田備中守様

   右御老中様江竹島鮑五百入 一折宛

      松平因幡守様

      石川美作守様

   
  • 最終更新:2009-08-23 08:0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