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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용복 元祿九年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과 安龍福 안용복  
2008/09/12 11:14

http://blog.naver.com/kwonoyub/1100352238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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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元祿九年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과 安龍福



1, 서

2, 『元祿覺書』 의 구성.

3, 『元祿覺書』의 내용

(1) 조선주의 표착

(2)조선인의 구성

(3)대관과의 교류 [자진신고] [신뢰관계] [서간의 교류] [대관의 대응]

4, 결론



1, 서

2005년 2월에 일본 島(시마)根(네)縣(켄) 隱(오)岐(키)郡(군) 海(아)士(마)町(초)의 村(무라)上(카미)助(스케)九(구)郞(로)씨가 자택의 土壙에 수장되어 있는 고문서를 정리하던 중에, 1696년 5월에 그곳에 표착한 안용복 일행의 진술과 행적을 기록한 『元(겐)祿(로쿠)九(구)丙(병)子(자)年(년)朝(조)鮮(선)舟(주)着(착)岸(안)一(일)卷(권)之(지)覺(각)書(서)』[1]을 발견하여, 2005년 5월에 17일자의 『山(산)陰(인)중앙신문』에 공개했다.[2] 鎌(가마)倉(쿠라) 이래의 많은 고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村上家는 1221년 承(죠)久(큐)의 난에 의해 隱岐로 유배된 後(고)鳥(토)羽(바)上(죠)皇(코)를 시중하다, 사후에는 능을 관리했던 가문으로, 1638년부터 大(오)庄(쇼)屋(야)의 역할을 수행했다.[3] 隱岐國은 松(마쓰)前(마에)藩(한)이 감독하는 곳이었으나 1688년부터 1729년까지는 막부가 직할하는 天(텐)領(료)로 石(이와)見(미노)國(쿠니) 銀(긴)山(잔)料(료) 大(오오)森(모리)代(다이)官(칸)이 관할하고 있었다. 파견된 관리의 수가 적어, 大庄屋가 일상적인 행정실무를 담담하기도 했다. 이것이 표착하여 자진 출두한 안용복의 진술을 기록한 고문서를 收藏한 계기였다.

『원록지각』은 표지를 포함하여 15페이지로 구성된 기록물로, 표착선과 11인의 선원을 소개하고, 안용복이 뇌헌・김가과와 같이 「조선팔도지도」를 보이며 진술한 내용과 일행의 행적을 관찰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4] 안용복은 지도를 보며 竹(다케)島(시마)와 松(마쓰)島(시마)가 조선의 울릉도와 자산도라고 설명하고, 鳥(돗)取(토리) 伯(호)耆(키)태수에게 소송하러 가는 도중에 표착한 사실을, 일본에 납치되었던 경험 등을 이야기 했고, 식량의 협조도 요청했다.

일행이 자진 신고한 탓인지 代(다이)官(칸)所(쇼)도 협조적이었다. 일행의 진술도 문답이나 대담으로 표현했다. 식량의 요청은 물론 소송서류를 정리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편리도 제공했다. 일행도 그에 상응하여 전복을 선물하는 등의 예를 취했다. 이러한 호의를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는, 납치했다 송환시킬 때 鳥取藩이 보인 3년 전의 호의와 같이 생각해볼 문제다.

代官은 일행의 진술과 관찰한 내용을 정리하고, 안용복 일행이 제출한 서장과 교환했던 서간 등을 첨부하여 鳥取藩과 石見國을 통해 江(에)戶(도)에 보고했는데 그것이 발견된 것이다.

총 31단으로 나눌 수 있는 본문은 안용복 일행이 진술한 내용과 일행을 관찰한 내용, 일행과 代官所의 교류 등으로 구성되어, 당대의 조일 관계를 추정하기에 좋은 자료다. 특히 안용복과 그의 진술을 객관적인 기술했다는 점에서 그의 실체의 규명은 물론, 당대의 표류민 정책도 추정 가능하다. 승려 뇌헌이 소지한 주인장과 서류 등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이곳의 주인장이 일본이 남방무역의 방법으로 막부가 발행하는 주인장과 같은 성격의 것이라면 그것이 갖는 의미는 아주 크다 할 수 있다. 주인장을 가진 승려가 어떤 이유에서 일행에 참가하게 되었는가를 아는 것은 당대의 사회상을 아는 축이 될 것이다. 뇌헌은 관광 목적이라 했으나 믿기 어려운 말이다. 다른 의미가 있었기 마련이다.

본 논문에서는 안용복 일행의 진술과 그 일행과 행적을 기록한 내용이 갖는 의미를 개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안용복이 진술한 내용을 근거로 울릉도와 자산도의 의미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나 본 논문에서는 그 이전 단계로 기록의 구성과 일행의 성격, 그리고 일행과 대관소의 교류내용을 살펴보는 것에 중점을 두기로 한다.



2, 『元祿覺書』의 구성

 『원록각서』가 발견되자 松(마쓰)江(에)市(시)의 樋(히)野(노)俊(토시)晴(하루)가 해독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內(나이)藤(토)正(세이)中(추)가 「오키의 안용복」이라는 논문을 발표하고,[5] 이어 『竹島=獨島論爭』에 현대어역을 실었고[6], 그것을 保(호)坂(사카)祐(유)二(지)가 번역 소개했다.[7] 손승철도 해독을 주로 하는 논문을 발표했다.[8] 

표지를 포함하여 8매 15페이지로 구성된 『元祿覺書』는 31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구분이 애매한 부분도 있으나 그렇게 하는 것이 전체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구분했다. 또 그것은 착안한 조선주의 크기와 용량, 속인과 승려로 구성된 승무원 11인의 설명, 安龍福・金可果・雷憲・衍習의 신상기록(본문1-본문5), 안용복 일행의 진술을 기록한 부분(본문6-본문20), 일행의 행적을 관찰한 부분(본문21-본문27), 보고서(본문28), 소지품과 「조선팔도명」을 기록한 부분(29-31단) 등으로 대별된다. 체계적이지 못하고 산만한 부분도 있으나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표지, 『원록각서』의 분량과 표제가 기록되어있다. 표지를 포함하여 8매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上紙共八丁」과 元祿 9(1696)년 병자년에 조선의 배가 隱岐에 착안했기에, 그 상황을 1권으로 기록했다는 의미의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라는 기록이 있다.

본문1, 隱岐國 嶋(도우)後(고)에 착안한 조선주에 대한 개괄. 선형과 용적량과 도구(1頁1행-16행).

본문2, 속인 6인(안용복・李裨元・김가과・무명의 3인)과 승려 5인(뇌헌・연습・무명의 3인) 총11인의 일행(1頁17행-2頁12행)[9]

본문3, 안용복의 신상기록. 通政大夫 갑오생 43세. 의관과 腰札(2頁13행-23행).

본문4, 김가과의 신상과 의관(2頁24행-27행)・

본문5, 興國寺 뇌헌과 그제자 연습의 신상기록. 乙巳 윤3월 28일 金烏山의 朱印狀. 康熙 28년 윤3월 20일부의 朱印의 서류. 필구. 33세의 연습(3頁1행-17행).

본문6, 안용복・뇌헌・김가과가 在藩人의 입회 하에 「八道之圖」를 제시하고 안용복의 통역으로 질문에 답한 대담(3頁18-23행).

본문7, 선중의 화물, 말린 전복, 별도의 목록에 대한 언급(3頁24-4頁2행).

본문8, 승려가 참가한 이유와 종파에 대한 질문. 뇌헌・이비원의 필담(4頁3행-11행).

본문9, 안용복이 진술한 竹島와 울릉도(4頁13행-17행).

본문10, 안용복이 진술한 松島와 子山島(4혈18행-20행).

본문11, 3월 18일 저녁에 죽도/울릉도에 도착한 일행(4頁21행-5頁1행).

본문12, 죽도에 온 13척의 승무원의 총 인원(5頁2행-5행)

본문13, 죽도에서 어렵하는 12척. 전복의 상황(5頁6행-9행).

본문14, 隱岐에 표착한 사정(5頁10행-6頁3행).

본문15, 죽도와 조선, 죽도와 송도의 거리(6頁4-5행).

본문16, 납치 당한 안용복과 도라베. 죽도의 도라베(6頁6-9행).

본문17, 10가마 정도의 식량의 분배와 식량사정(6頁10행-13행).

본문18, 귀국과 납세(6頁14행-17행).

본문19, 강원도의 죽도를 지배하는 동래부사(6頁18행-7頁2행).

본문20, 4년 전에 일본에서 받은 물품기록 1권의 제출(7頁3행-5행).

본문21, 일행이 보낸 서간과 전복(7頁6행-14행).

본문22, 식량을 요구하는 안용복. 일본과 조선의 용기(7頁15행-9頁6행).

본문23, 신상과 요망사항, 소송의 이유를 거절한 일행(9頁7행-15행).

본문24, 뇌헌의 의관과 연습의 염주(9頁16행-10頁8행).

본문25, 해변의 민가에서 정리한 소송서(9頁16행-10頁21행).

본문26, 폭풍으로 이동이 불가능한 일행(11頁1행-7행).

본문27. 사자의 선정과 식량원조(11頁8행-14행).

본문28, 보고서. 첨부된 조선인의 기록(11頁15행-23행).

본문29, 조선주의 화물(12頁1행-13頁4행).

본문30, 무명씨가 없는 일행의 명단(13頁5행-18행).

본문31, 「조선지팔도」(14頁1행-9행).



3, 『원록각서』의 내용

착안한 조선주의 상황과 일행의 객관적 기록과 일행의 진술을 기록한 부분, 일행의 3일간의 행적을 관찰하여 기록한 부문 등으로 구성된 『원록각서』의 내용을 정리해보면 일행의 도해목적은 물론 당대 조선인의 영토인식이나 사회제도 등도 추정 가능하다. 특히 승려가 참여한 의도나 그들이 소유한 소지품을 등을 통해 규명될 사항도 많다.



(1) 조선주의 표착

1696(元祿6)년 5월 20일에 隱岐國 大(오)久(쿠)村(무라)에 표착한 배에는 11인(속인 6, 승려 5)이 타고 있었는데, 그 들은 죽도/울릉도에서 어렵을 하는 12척과는 달리 鳥取藩에 소송하기 위해 도해하던 중이었다. 원래 竹島에는 13척의 배가 도해했다 한다. 싣고 온 식량을 배분했다는 기록이나,[10] 용무를 마치면 죽도로 돌아가 12척의 배에 싣고 6, 7월경에 귀국한다는 계획이 있어 같은 선단으로 볼 수도 있다.[11] 그 12척에 탄 승무원수는 배마다 달라, 9인부터 15인까지 타고 있었는데, 총 인원수는 알 수 없었다.[12] 안용복이 3년 전(원록각서는 4년 전)에 일본에 납치되었다 송환되는 도중의 1693년 9월 4일에 長(나가)崎(사키)에서 그 과정을 진술한 것에 의하면, 10인이 승선했으나 한 사람이 영해에서 내려, 9인이 죽도에 건넜다 한다. 이는 13척의 선원이 9인에서 15인이라고 진술한 최소인원과 부합하는 숫자이다.

안용복이 3년 전 長崎에서 「1척은 전라도의 순천이라는 곳의 배로 17인 탔으며 1척은 경상도 카토쿠라는 곳의 배로 16인이 타고 있다. 2척 모두 4월 5일에 竹島에 도착했다. 두 척에 탄 사람들 모두를 알지 못했다」[13]라고 진술했던 것을 보면, 13척 중에는 안용복이 탄 배를 비롯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배가 포함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어, 13척을 같은 선단으로 보지 않을 수도 있다. 안용복이 싣고 왔다는 쌀은 같은 선단의 식량으로 볼 수도 있으나 매매를 목적으로 싣고 온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일행이 3월 18일 조반 후에 출발하여 죽도/울릉도에서 저녁을 들었다는 것은, 도해에 12시간 전후가 소요되었다는 것으로, 출발지는 울릉도와 가까운 조선 동해안으로 추정된다.[14] 3월 18일에 울릉도에 도착한 일행은 그곳에 55일 정도를 머물다 5월 15일에 그곳을 떠나 동일에 송도/자산도에 도착하여, 5월 16일에 그곳을 떠나, 5월 18일 아침에 隱岐國에 도착했다. 죽도/울릉도에서 송도/자산도에 도착한 시각의 기록은 없으나 16일에 그곳을 떠났다 하므로, 약 2개월간 죽도/울릉도에 머문 일행이 송도/자산도에 1박했을 가능성은 크다.

당시의 도해는 3월 11일에 승무원을 조직하고, 15일에 울산을 출발하여 동일에 울산 브이가이에 도착하여, 25일에 그곳을 떠나 경상도의 엔바이에 도착, 27일 진시(08시)에 그곳을 떠나 10시간의 항해 후 유시(18시)에 죽도/울릉도에 이르렀다. 울산을 떠나 브이가이에 10일간, 엔바이에 2일간 머문 것에 비해, 엔바이를 떠나 죽도에 도착한 것은 10시간에 불과했다. 항해준비에 그 만큼의 시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15]

항해의 기간보다 그 준비기간이 더 길다는 것은 일본 기록으로도 알 수 있다. 그 내용을 알기는 어려우나, 당시의 해금정책을 생각하면, 물품의 준비 외에도 신고나 허가가 더 복잡했을 수 있다. 사무역이 국가 재정을 핍박할 수 있어 중국은 물론 조선이나 일본도 체제를 유지한다는 차원에서 해금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조선의 태종이 1407년에 울릉도 도해를 금한 정책이 유지되고 있었고, 일본 역시 쇄국정책에 따른 주인선 제도를 실행하고 있었다. 그런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면 조선과 일본 어민들의 울릉도 도해는 특수한 일이었다. 도해과정을 한컴돋움" \* hps10 \o\ad(\s\up 9(오(오카)한컴돋움" \* hps10 \o\ad(\s\up 9(지(지마)한컴돋움" \* hps10 \o\ad(\s\up 9(마(마사)한컴돋움" \* hps10 \o\ad(\s\up 9(요(요시)의 『한컴돋움" \* hps10 \o\ad(\s\up 9(인(인)한컴돋움" \* hps10 \o\ad(\s\up 9(푸(푸)한컴돋움" \* hps10 \o\ad(\s\up 9(넨(넨)한컴돋움" \* hps10 \o\ad(\s\up 9(표(표)』를 통해 보면

 

2월 11일에 이곳에서 배를 내어, 동 30일에 隱岐國의 福浦에 도착했다. 3월 24일에 隱岐國에서 배를 내어, 동 26일의 아침 辰時 경에 竹島의 이카도에 배를 대고,[16]

 

라고, 2월 11일에 米(요나)子(고)를 떠나 2월 30일에 福(후쿠)浦(우라)에 도착하여 3월 24일에 떠나 26일에 죽도에 도착했다. 44일 걸린 것이다. 3월 27일부터 4월 1일까지 4일에 이루어진 귀항을 생각하면, 40일 정도나 도해준비를 한 것이 된다. 익년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米子를 2월 5일에 출선하여, 동 17일의 아침에 雲州의 雲津에 도착했다. 3월 2일에 雲津를 출항하여 동일에 隠岐国의 島前의 첫마을에 도착했다. 3월 9일까지 체재하고 10일에 島後의 福浦에 도착하여 4월 16일에 福浦를 출항하여 동 17일의 오후 2시에 竹島의 토우센가崎에 도착,



74일 걸린 일정이었다. 그러나 그곳에 조선인들이 먼저 도착하여 어렵하고 있었기 때문에 大谷家 어민들은 어렵을 포기하고 안용복과 박어둔을 납치하여 귀항하는데,

  

4월 18일에 竹島를 떠나 隱岐國의 福浦에 동 20일에 도착했습니다. (中略). 동 23일에 福浦를 출항하여 島前에 도착하고, 동 26일에 島前에서 출항하여 동 26일에 雲州의 長浜에 도착하고, 동 27일에 米子에 귀항했습니다.   



로 알 수 있듯이 10일이 걸리지 않는 항해였다. 이처럼 도해하는 기간과 귀항하는 기간이 크게 다른 것은 도해 전에 준비할 것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안용복 일행이 울릉도에 2달 가까이 머문 것은 어렵의 기간으로 볼 수도 있으나 도해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3개의 목면깃발을 세운 배는, 1장 2척의 폭이고 깊이가 4척2촌으로 80석을 실을 수 있는데, 돛대 2개, 돛 2개, 키 1개, 노 5정, 나무 닻, 닦나무 4다발, 돗자리 깔개, 개가죽(본문1), 말린 전복, 미역, 물품목록(본문7). 백미 3홉, 미역 3표, 소금 1표, 말린 전복, 장작 6다발, 칼 1자루, 호신용 칼 1자루, 창 4개, 장도 1개, 반궁 1개, 화살 1상자. 돛대 2개, 돛 2개, 키 1개, 발, 지붕 10매 개가죽(본문29) 등을 싣고 있었다. 이것들 중의 칼 1자루, 호신용 칼 1자루, 창 4개, 장도 1개, 반궁 1개, 화살 1상자 등은 무구로 볼 수도 있으나, 11인이 소지한 양으로 보아 공격용 무기로 보기보다는 생활용품으로 보아야 한다. 도해 목적이 무력을 동반하여 해결하는 내용의 아니었다는 것을 엿볼 수 있는 소지품들이었다.



(2) 승선원의 구성

일행 11인의 이름이 처음부터 밝혀진 것은 안용복・이비원・김가과라는 속인 3인과 뇌헌・연습이라는 승려 2인이었다. 나머지 세 속인과 세 승려는 무명씨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23일의 보고서에는 여섯 무명씨의 이름도 명기되어, 처음에 무명씨로 처리한 이유를 알 수 없다. 장기간 동승한 일행의 이름을 서로가 모를 이유가 없음에도 무명씨로 처리한 것에는 어떤 이유가 있었기 마련인데, 그것은 본문23을 통해 추정해 볼 수 있다.



十壹人之內名歲知レ不申分(外)猶又宗門之義銘々ニ願ハ書記伯州へ訴訟之わ(王(わ))け書付出シ候樣ニと申候得者始ハ心得候由申候處廿二日之朝ニ至り其事共書出スニ不及候伯州へ參委細可申上由重而ハ其問事無用ニ可仕由書付出申候則差上ケ申候



라고 일행의 신분과 요구사항 소송의 이유 등의 질문에 일행이 거절한 내용인데, 이 해독이 둘로 갈라진다. 內藤正中의 상기 해독을 손승철은 「分」을 「外」, 「わ」를 「王」으로 해독하여 전체흐름에서는 차이가 없는 것 같으나 전체적인 해석은 다르다. 손승철은



   11인 가운데 이름과 나이를 알지 못하며, 그 외에도 또 종파의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그대로 백주에 소송하는 문제를 제출한다고 합니다. 22일 아침에 이르러서도 그 사실을 써내지 못하였으므로, 백주에 가는 사유를 거듭하여 물어서 알려드리겠습니다.



라고 해석하여, 일행의 이름과 종파를 서로 알지 못하며 伯州에 소송 문제를 제출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는 해석이다. 또 代官所가 22일에도 일행의 신상은 물론 伯州에 가는 사유도 몰랐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하니 파악해서 알려주겠다는 것이다. 22일 아침에도 써내지 못했다는 것은 일행이 의무를 이행하지 못했다는 것으로, 일행 중에 신상이 분명하지 않은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거나 기록의 능력이 없었다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장기간 동승한 일행이었고 기록이 가능한 일행이 포함되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정할 수 없는 일이다. 또 「其問事無用ニ可仕由書付出申候」를 해석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이를 호사카는



   11인 중 이름과 나이를 말하지 않은 사람, 그리고 종파 등에 대해 각자 바라는 바를 쓰고 호키국에서 소송을 할 이유도 적어서 내달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알았다고 하더니 22일 아침에는 그 일은 적어 놓을 수 없고 호키국에 가서 상세히 말하겠다고 하여 다시 질문하지 말아달라는 글을 보내왔다.   



라고 해석하여 代官所가 신상과 종파 소송의 이유를 기록하여 제출할 것을 요구하자, 처음에는 알았다고 답한 일행이 22일에는 거부하며, 伯耆國에 가서 이야기할 것이니 재차 묻지 말라는 의지를 표한 것으로 했다. 이는 필자가



十一人の内、名、年知れ申さざる外猶また宗門の義銘々に願うは書記し伯州へ訴訟の訳書き付け出し候ようにと申し候えば、始めは心得候由申し候ところ、二十二日朝に至りその事とも書き出すに及ばず候。伯州へ参り委細申し上ぐべき由、重ねてはその問事無用に仕るべき由書き付け出し申し候。

  11인 중 이름과 나이를 모르는 것 외에 또 종파, 그리고 각자가 원하는 것을 기록하고,伯耆國에 소송할 이유를 써서 내달라고 했는데, 처음에는 알았다고 하더니, 22일 아침이 되자 그것들을 적어 낼 수 없습니다. 호키국에 가서 상세히 말하겠으니, 다시는 질문하지 말라는 것을 서면을 보내왔습니다.



라고 해석하는 것과 유사하다. 말하자면 22일 아침까지 일행은 모든 사람의 신상과 종파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23일의 보고서에 모든 사람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면 22일 아침 이후에 일행이 알려주었거나, 역인들이 노력하여 알아낸 것이 된다. 소송의 이유는 伯耆에 가서 직접 설명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은 이해할 수 있으나, 신상과 종파에 대한 답을 거부한 사실은, 상호간의 신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장기간 동행한 일행이었고, 일행 중에 기록능력을 가진 자들이 있었으므로, 모르거나 기록능력이 없는 것을 원인으로 했다기 보다는 그럴 필요가 있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름이 없는 천민이었거나 밝히지 못할 사정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출한 최종보고서에 모두의 이름이 기록된 것을 보면 무명씨는 없었던 셈이다.

22일 아침까지도 존재했던 무명씨의 일행이 23일의 보고서에 柳上工・金甘官・유카이・靈律・丹冊・騰淡으로 명기되었다는 것은, 22일 아침 이후와 보고서가 완성되는 23일에 일행과의 교류, 또는 역인들의 정보활동으로 밝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쩌면 일행이 소송의 이유만 거부하고 신상과 종파에 대한 정보는 제공했는지도 모른다.

속인과 승려로 구별되는 일행이 유명씨와 무명씨로도 구별되고, 안용복・김가과・이비원・뇌헌・연습이 특기된 것을 보면 능력으로도 구별되는 구성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속인의 경우는 안용복・김가과, 안용복・이비원이 쌍을 이루고, 뇌헌・연습이 쌍을 이루는 것을 보면, 이 5인과 특기된 일이 없는 5인 간에는 역할이나 능력으로 구별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특히 무명씨였던 유카이를 「이 사람은 글자를 쓰지 않았다. 신분이 낮아서인지 항상 말석에 앉았다라는 내용을 특기한 것을 보면, 일행에 역할이나 능력에 의한 질서가 있었던 것 같다.[17] 이곳을 손승철은「이 자는 물어보았으나 잘 모르겠습니다」라고 해석하여 「매번 말석에 앉았다」는 내용의 해석이 없어 불충분함을 느낀다.

기록으로 보아 일행의 대표는 안용복과 뇌헌이다. 둘에 대한 기술이 가장 상세하고 매사에 둘이 참여했다. 안용복의 경우는, 갓을 쓰고 부채를 들고 腰札을 찼다는 외양과 43세의 동래인 통정대부라는 신상까지 기록하고,[18] 김가과는 외양만을, 이비원은 건강과 필담의 능력만을 기록하여, 안용복이 속인을 대표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뇌헌의 기록은 안용복의 경우보다도 자세하다. 염주를 걸고 부채를 들었다는 외양은 물론 55세의 흥국사 주지로 제자 넷을 동행한 사실까지 소개하여, 그를 차별화했다. 배의 화물을 소개하면서도 뇌헌의 소지품을 별도로 기록하는 것도 특별한 존재라는 사실의 시사였다. 소지품 중에 관심을 끄는 것은 주인장과 주인이 찍힌 서류다. 일본의 역관들은 뇌헌의 종파에 관심을 보였으나 그보다 그가 왜 그런 서류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들이 무엇을 의미하고 어떤 사회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가는 규명되어야 할 중요한 문제다.

오키에 표착한 것은 안용복 일행의 1척이었으나, 울릉도에 12척이 남아 있어, 원래는 13척이 울릉도로 도해한 셈이다. 또 울릉도에는 3년 전에 안용복과 납치당했던 도라베가 그곳에 남아 있고,[19] 귀환하는 6, 7월에 동선하기로 되어 있어, 원래의 일행은 12인이었던 셈이다. 문제는 울릉도에 남은 도라베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이다.[20] 일행의 진술에 의하면 6, 7월에 울릉도에 돌아가 합세하기로 되어있어, 울릉도에 남은 도라베는 일행을 기다리며 나름대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기 마련이다. 다른 배의 승무원으로 종사하는 일이 되었던 병을 치료하든 일행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기 마련이다. 이처럼 도라베가 울릉도에 남아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면, 鳥取를 떠나 강원도 양양으로 직행한 것으로 알려진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鳥取를 떠난 일행이 울릉도를 경유하여 양양에 간 것이 된다.





(3)대관과의 교류

[자진신고]

 鳥取로 도해하던 일행은 18일에 隱岐國 西(니시)村(무라)에 표착하였으나, 상륙하지 못하다 29일에 大(오)久(쿠)村(무라)에 상륙했다. 16일에 子山島를 출발하여 18일 아침에 西村에 도착했으나, 보통은 몇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에 20일에야 도착한 것은 악천후였기 때문이다. 일행은 在藩所를 찾아가 표착한 사실을 설명하며 편리의 도모를 요청했다. 

당시 隱岐는 막부가 직할하는 天(텐)領(료)로, 石(이와)見(미노)國(쿠니) 大(오)森(모리)銀(긴)山(잔)領(료)의 代(다이)官(칸)이 지배하는 곳으로 大森 代官所가 後(고)藤(토)角(쓰)右(노)衛(에)門(몬)을 隱岐 代官으로 파견했다. 代官은 부하 中(나카)瀨(세)彈(탄)右(에)衛(몬)門과 山(야마)本(모토)凊(키요)右(에)衛門(몬)에게 일행과 대담하게 하고 松(마쓰)岡(오카)彌(야)次(지)右(에)衛門(몬)을 사자로 했다. 20일에 大久村에 표착한 일행은 그날 밤에 가요이에 배를 대고 大久村에 갔다.[21] 여기서 배를 대고 大久村에 갔다는 표현의 「參」은 「가다」「오다」「있다」 등의 경어이고, 귀인이나 상사를 뵈는 것, 신불이나 사자를 참배하는 것 등을 의미하기 때문에, 일행이 代官을 찾아가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표착한 일행은 스스로 代官을 찾아가 신고한 것이다.

일행이 代官所를 찾아간 시각의 기록은 없으나 20일에 大久村에 갔고 21일에 안용복이 식량이 떨어졌다는 서간을 보냈다는 것을 보면 20일에 찾아가 자진 신고한 것이 된다. 「조선의 배 일척이 5월 20일에 隱岐國에 착안했다」[22]라고 鳥取藩에 보고한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일행의 진술을 「문답」, 「대담」으로 표현했다. 일행은 재번소 역인의 입회 하에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진술했는데 그것을 「물으면 답하다(事ヲ問申候得ハ答申候)」라고 질문하고 답하는 양쪽 모두에 「申候」라고 표현하여, 대등한 입장의 문답이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또 진술을 마친 것을 「세 사람과 재번 역인의 대담이 끝」난[23] 것으로 표현하여, 심문이 아닌 대담을 한 것으로 기록했다. 이 대담이 본문6부터 20까지다.



[신뢰관계]

일행과 代官所는 신뢰하고 있었다. 일행이 진술한 내용을 조사 확인하면 틀림이 없었다. 소송하는 이유를 묻는 질문에, 직접 이야기할 것이라며 거절한 것 외에는 거절한 일이 없고, 대관소의 강제적인 요구도 없었다는 것이 상호간의 신뢰를 시사한다.

20일에 조사한 일행의 명단에는 무명씨로 되어 있던 6인이.[24] 23일의 보고서에는 무명씨가 하나도 없다.[25] 이처럼 20일에는 몰랐던 사실을 23일에 알았다는 것은, 代官所가 정보제공을 강요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교류하며 자연스럽게 구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행에 승려가 포함된 의미도 뇌헌과 필담을 나누어 부족한 부분을 이비원과 필담하여 알아내고 있었다.[26] 그러고도 22일에 다시 물었다.

22일에, 일행의 신상과 승려가 승선한 이유, 각자가 원하는 것, 그리고 소송하려는 까닭 등을 서면으로 제출해줄 것에 대한 요구를 처음의 약속과 달리 거절했다는 것은, 일행이 싫으면 답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위에 다시 질문하지 말 것까지 요구한 것은 일행이 그 만큼 당당했다는 것이다.[27] 이것이 식량을 원조받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대방의 입장을 존중하고 신뢰하는 관계였다는 알 수 있다. 다만 이곳의 거절은 모든 거절이 아니라 소송의 이유만 거절한 것으로 보인다. 종파에 대한 것은 이미 21일에 필담했고 23일의 보고서에 무명씨가 하나도 없다는 것으로 추정 가능한 일이다.

20일에 대담을 마친 일행이 전복 6포를 보내 예를 표하며 필요한 물건을 요청하는 서간을 보내자, 代官所는 그것을 반환하면서도 요청한 물품에 상응하는 것들을 보낸 것에서부터 시작된 신뢰였다.[28] 일행의 요구는 21일에도 이어진다. 그것은 전날의 요구와 달리 급한 식량의 요구로, 鳥取에 도해할 때까지의 대책을 요구한 것으로 생사가 걸린 요구였다. 代官所는 사람을 보내 확인하고 요구에 응했다. 그 이전에 일행과 代官所는 표착민에 대한 관례를 논쟁한 일이 있었으나, 일행의 특수상황을 인정하여 식량의 조달을 결정했다.[29] 사건을 통해 신뢰를 쌓아가는 관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요구와 응대였다.

일본의 상황도 좋지 않았으나 마을에서 모은 쌀과 代官所의 쌀로 21일의 저녁과 22일의 식량을 해결하고, 이후에도 그 방법으로 대처하기로 했다. 일행이 그곳을 떠나 赤崎 나타나는 것이 6월 4일이었으므로, 23일 이후에도 계속해서 식량을 원조한 것이 된다. 이러한 협조는 상호의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신뢰는 상호가 취하는 예를 원인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으나 그것이 모든 원인은 아니었던 것 같다. 鳥取藩에 소송하러 가는 일행의 도해목적을 인정한 것도 원인의 일부였다고 생각한다. 일행이 도해의 목적과 의지를 밝혔고,[30] 代官所가 「백주에 소송하는 이유(伯州へ訴訟之わけ」, 「이번의 소송(今度之訴訟)」이라고 표기하고, 소송서를 정리하는 장소까지 알선해 준 것은 일행의 특병성을 인정했기 때문인데, 그러한 특수성이 있어 신뢰허고 협조한 것이다.

일행의 도해의 목적과 의지를 확인한 이상, 일행을 鳥取藩의 객으로 대우해야 했다. 代官所가 鳥取藩의 관할은 아니나 그곳을 통해 막부에 보고될 가능성을 알기 때문이다. 기록에는 23일에 石見國에 보고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鳥取藩도 보고를 받았다. 일행이 6월 4일에야 赤崎에 나타난 것은 代官所가 지연작전을 편 결과일 수도 있다. 후일에 안용복이 비변사에서 「오래 기다려도 소식이 없어, 분을 이기지 못하여 배를 타고 곧장 백기주로 향했다」라고 진술한 것이 있어,[31] 일행의 도해를 늦추려는 代官所의 의도가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억류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서간의 교환]

5월 23일의 보고서에는 「조선인의 한권의 문서」와 조선인이 제출한 문서의 목록을 첨부되었다.[32] 소송서 외에 일행과 교환했던 기록물도 첨부한 것이다. 이는 일행과 代官所가 필요 사항을 서면으로 주고받았다는 것으로, 일행이 문자생활에 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행은 처음부터 팔도지도를 지참하는 등 기록을 중시하고 있었다.[33] 代官所 역시 대담내용을 기록하고 있었으므로, 양측의 교류는 기록을 매개로 하는 교류였다 할 수 있다. 대담 후에 일행이 전복을 선물하며 서간을 첨부했고 代官所도 서간으로 답할 정도였다.

식량의 요구도[34] 소송의 이유를 알려달라는 요구의 거절도 서간이었다. 승려의 종파에 대한 질문에도 뇌헌과 이비장이 서류로 답했고,[35] 원조해준 식량에 대한 감사도 서간으로 표했다.[36] 이 같은 것을 근거로 하면, 목록에 기록된 문서는 약 8건에 이른다. 이 같은 사실을 뇌헌이 소지한 필기도구와 같이 생각하면,[37] 일행의 기록에 의한 생활이 일상화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代官所의 대응]

代官所는 일행에 관한 것을 관계요로에 보고했다. 代官 後藤角右衛門은 대담할 때, 부하 中瀨彈右衛門과 山本淸右衛門, 松岡彌次右衛門 셋을 입회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 3인과의 대담에 3인의 부하가 입회했다면 代官을 포함해서 7인이 동석했다는 것이 되나, 대담을 마친 일행이 전복을 庄屋에게 1포 역인에게 5포를 선물하려 했다는 것을 보면 한 사람이 더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아니면 庄屋와 역인들에게 1포씩 代官에게는 2포를 증정한 숫자로 볼 수도 있다.

일행과 나눈 이야기를 대담으로 표현하고, 代官다이 물으면(問申候) 일행이 답하는(答申候) 형식과 과정을 소개한 것에서는 代官이 표하는 예를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단지 자진신고에 대한 예우였다기보다는 鳥取藩을 방문한다는 객에 대한 예우였을 수도 있으나, 어쨌든 代官의 업무능력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이국의 객을 소홀히 대하는 것으로 범할 수 있는 결례를 범하지 않으려 한 것이다. 비일상적인 일에 신중을 기하며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당시 代官所는 西(사이)鄕(고)에 있어, 일행이 표착한 大久村과는 거리가 있다. 그럼에도 소홀함 없이 대처했다. 21일부터 23일까지 조선선을 西鄕로 회선시키려다 풍우가 강하자, 그곳에 계류시키고 감시하게 했다. 현장에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한 것이다. 代官所와 大久村을 왕래한 기록이 본문 27에 있다. 일행의 건을 石見代官所에 보고하는 사자로 西鄕에 있는 松岡에 명하기 위해 大久村에 있는 그를 西鄕로 소환하고, 西鄕에 있는 高梨杢左衛門과 河嶋理太夫를 大久村에 보냈다.[38] 이로 보아 代官은 西鄕에 있으며 상황에 대응하여 부하들에게 임무를 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代官은 표착인의 정보를 石見 代官所를 비록한 관계요로에 보고해야 했기에 정확한 정보를 수집해야 했다. 일행과의 대담이나 방문조사, 행적의 관찰 등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으나, 수집한 정보는 현장 검증과 같은 방법으로 확인하고 있어, 임무에 충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명씨로 처리된 6인의 이름을 규명한 것이나, 부하를 보내 사실을 확인하고 상황에 대처한 것 등으로 알 수 있는 임무 수행이었다. 기록이 없는 23일 이후에도 식량을 원조하는 등 일행을 보호 감시하며 관계 요로와 적절한 연락을 취하고 있었을 것이다.

보고는 石見 代官所에만 보고한 것으로 되어있으나 鳥取藩에도 보고했다. 鳥取藩은 5월 23일자의 보고서를 6월 2일에 받고 江戶에 있는 藩主에게 보고했고, 13일에 보고를 받은 번주는 당일에 노중에게 보고했다.[39] 신속한 보고였다. 隱岐 代官의 보고가 20일만에 노중에게 보고된 것이다. 당시의 연락망으로 보아 신속한 보고였다. 鳥取藩이 막부에 보고했다는 것은 石見國도 보고했다는 것으로, 막부는 복수 이상의 보고를 받은 것이 된다. 이처럼 隱岐 代官은 취해야 하는 조치를 빈틈없이 취하고 있었다.         



4, 결론

17세기의 일본은 독도가 포함되는 울릉도를 竹島磯竹島라 칭하는 방법으로 탈취를 기도한 일이 있다. 그것을 위해 울릉도에서 안용복을 납치했으나, 그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령이라는 반론을 제기하여, 일본이 그것을 인정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런 연유로 독도문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안용복이다. 일본은 그 안용복을 범법자로 단정하는 방법으로 그의 부정은 물론 조선의 기록까지 부정하려 한다.

일본은 안용복이 울릉도와 독도/잔산도가 일본이 말하는 죽도와 송도라고 진술한 것을 부정하는 방법으로 그를 난폭한 문맹자로 단정하고, 그의 영토인식이 납치 당한 경험을 통해 얻은 것일 뿐 조선의 일반적인 인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조선인들은 20세기 초에 일본을 통해 겨우 인식한 것이지, 17세기에는 그 존재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696년에 안용복 일행이 진술한 것을 일본인이 기록했다, 2005년에 발견된 『원록각서』는 그 같은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해주고 있다. 『원록각서』는 안용복이 난폭한 문맹자라는 종래의 주장과는 달리 기록을 중시하며 상대를 배려하는 인격자로 기록하고 있다. 대관은 안용복 일행과 나눈 이야기를 대담 문답으로 표기할 정도로 예우하고 있었다. 일행 역시 전복을 선물하는 방법으로 호의에 답하고 있었다.

이처럼 일본의 종래의 주장과 다른 내용을 전하는『원록각서』를 근거로 안용복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은, 그를 매개로 하는 독도문제, 즉 조선의 독도인식이나 조선기록의 허실을 점검하는 일로 독도문제의 본질을 규명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그 전문이 소개되었을 뿐 그것을 근거로 하는 연구는 미미하다.

31단의 나눌 수 있는『원록각서』는 조선주의 형태와 화물, 11인 일행의 구성, 울릉도에 도해한 13척의 선단, 울릉도와 자산도의 지리적 설명, 동행한 승려에 대한 설명, 일행과 대관소의 교류와 신뢰관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17세기의 독도문제를 논하는데 있어서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내용이다.

그럼에도 본 논문에서는 소개에 의미를 두어 개괄적으로 내용을 소개하는 것에 의미를 두어, 속인과 승려로 구성된 일행의 소개, 대관소와 일행의 교류를 통한 신뢰, 안용복의 문자인식 등을 살펴보는 정도에서 마쳤다. 안용복이 진술한 울릉도와 자산도의 의미와 일행이 지참한 팔도지도가 가지는 의미 등은 다음 기회에 다루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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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元祿九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 이하 『원록지각』이라 함.

[2] 內藤正中저, 權靜 역 獨島와 竹島(제이앤씨, 2005년 11월), 334頁.

[3] 江戶時代의 마을 지도자. 서일본에서는 쇼야(庄屋)로, 동일본에서는 나누시(名主)라 칭했다.

[4] 安龍福雷憲金可果三人江在番人立会之時朝鮮八道之圖ヲ八枚ニシテ所持仕候(본문6)

[5] 內藤正中著 權五曄・權靜역『獨島와 竹島』(제이앤씨, 2005,11).

[6] 內藤正中・朴炳涉『竹島=獨島論爭』(新幹社,2007).

[7] 박병섭・나이토세이추 지음, 保坂祐二 옮김『독도=다케시마 논쟁』(보고사,2008,3).

[8] 손승철「1696,안용복의 제2차 渡日 공술자료」『韓日關係史硏究』제24호(한일관계사학회,2006,4).

[9]俗安龍福俗李裨元俗金可果俗三人名不書出年不書出,坊主雷憲坊主雷憲弟子衍習坊主三人名年不書出候.

[10] 朝鮮出船の節米五斗三升入り□十俵積み参り候えてども十三艘の者共に)給し申し候につき、只今は飯米乏しくなり候由申し候.

[11] 伯州用事仕廻し、竹嶋へ戻り十二艘の舟に荷物を積むを改め仕り六・七月のころ帰国仕り殿へも運上を差し上げ申す筈の由申し候.

[12] 船數十三艘ニ人一艘に九人十人十一人十二三人十五人程宛乗り、竹嶋迄参候由人数之高 問候而も一円不申候(『竹島紀事』元禄6,9,4).

[13] 類船之儀壱艘者全羅道之内シュンデン与申所之船ニ而人数十七人乗組同壱艘ハ慶尚道之内カトク与申所之船人数十六人乗組弐艘共ニ四月五日彼嶋ニ参候弐艘之人数船頭を初為存者壱人も無御座候(竹島紀事)

[14] 當子三月十八日朝鮮国朝飯後ニ出船同日竹嶋へ着夕、夕飯給申候由申候。

[15] 三月十一日乗組仕、同十五日二ウルサン出船仕、同日ウルサン之内ブイカイ与申所二罷着、同廿五日ブルカイ出帆仕、慶尚道之内エンバイ与申所ニ罷着、同廿七日辰之刻エンハイ出帆仕、同日酉刻竹嶋江罷着申候、エンハイ与竹嶋之間五十里程も可有之歟与覚申候朝鮮江原道より東ニ当り申候嶋之程朝鮮牧之嶋より少大ニ見へ申候、山之様子険阻ニして高く御座候(『竹島紀事』元禄6,9,4).

[16] 二月十一日爰元出船仕、同晦日ニ隠岐国之福浦へ着船仕、三月卄四日ニ隠岐国よ り出舟仕、同卄六日之朝五ッ時分ニ竹島之内イカ島ト申所へ着舟仕(中略) 竹島ヨリ三月卄七日之七つ時分ヨリ出 舟仕申候、(中略) 四月朔日ニ石州浜田浦へ着舟仕(川上健三『竹島歷史地理學的硏究』,古今書院,1966).

[17] ユウカイ此字相尋候得共書不供下々歟毎度末座ニ居申候。

[18] 安龍福午歳、四十三冠ノヤウナル黒キ笠水精ノ緒アサキ木綿ノウハキヲ着申候。腰ニ札ヲ壱ツ着ケ申候。表ニ通政太夫安龍福年甲午年表ニ住東莱印彫入。   

[19] 安龍福ととらべ弐人四年已然酉夏竹嶋ニ而伯州之舟ニ被連まいり候其とらべも此度召連参竹嶋ニ残置申候。

[20] 이곳의 도라베는 박어둔을 말하고 4년전은 3년전 원록6()1693년을 말한다.

[21] 舟懸り仕り二十日に大久村へ参り懸り居り申し候。

[22] 朝鮮之船一 艘五月廿日隱岐國江着岸(『御祐筆日記』元祿9년6월13일, 鳥取縣立博物館)

[23] 三人江在藩人對談終終り舟江三人共歸(21단)

[24] 三人名不書出年不書出(중략)坊主三人名年不書出候(본문2)

[25] 柳上工・金甘官・ユウカイ(중략)靈律・丹冊・騰淡(본문30)

[26] 沙門宗派五人共ニ一宗か又別宗か何宗そと尋候ヘハ雷憲其問ノ書付ニ答ヲ書記申候然共其分ケ不明様ニ相聞ヘ申候依之翌廿一日ニ宗旨名伯州へ参候わけ荷物等ノ儀書付相尋候ヘハ病人李裨元筆者ニテ書出ス書付有り則差上申候(본문8)

[27] 廿二日朝に至り其事共書出すに及候伯州へ参委細可申上由重而其問者事無用に可仕

[28] 其後ニ書簡を差し出し干鮑六包内一包ハ大久村庄屋へ五包ハ在番人へ之心入ニて指越候得共六包共ニ返シ申候其書簡之奥ニ生菜・菁菜実果請と御座候ニ付き苣・根深榧実・芹・生姜・など遣シ申候尤書簡之返事ヲモ相添適中慎(21단).

[29] 取鳥伯耆守樣へ訴訟在之參候と之申方に而候間飯米等用意可被参事と申候得者不審尤成義に候竹嶋十五日に出候得者

[30] 取鳥伯耆守樣江御斷之義在之罷越申候順風惡布候当地へ寄申候順次第に伯州へ渡海可仕候

[31] 則謂當轉報伯耆州而久不聞消息渠不勝憤惋乘船直向伯耆州(『肅宗實錄』肅宗22년9月戊寅)

[32] 此度朝鮮人一卷之書付並朝鮮人出候書付奉書目録に記之

[33] 三人江在番人立會之時朝鮮八道之圖を八枚にして所持仕候を出し申し候(본문6) 朝鮮國江原道東來府內に鬱陵嶋(본문9) 松嶋は右道の內(내)子山と申す嶋御座候(본문10)

[34] 廿一日安龍福より書付출し申飯米に切れ夕飯より食に絶え候由申越候(본문21)

[35] 雷憲其問の書付に答を書記申候(중략)病人李裨元筆者にて書出す書付有り(본문8)

[36] 朝鮮人悅申由に而書付指出申候(본문27)

[37] 金鳥山之朱印狀雷憲所持仕候を出し申候(중략)金鳥山朱印の書付雷憲所持仕候(중략)かけごに硯を仕組申筆墨在り(본문5)

[38] 石州ヘ為右注進松岡弥次右衛門渡海申付候ニ付廿二日弥次右衛門呼戻シ高梨杢左衛門河嶋理太夫大久村江遣置申候(본문27)

[39] 朝鮮の船一艘、五月二十日、隠岐国へ着岸(중략)両人より飛脚を以て、右の趣今月二日国元家来まで申し越し候(중략) 国元より今日飛脚を以て申し越し候に付き先は御届け申上げ置き候(『御在府日記』元禄九年六月十三日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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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권오엽의 우산국과 안용복 안용복 元祿九年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과 安龍福  
                    권오엽의 우산국과 안용복 안용복 元祿九年丙子年朝鮮舟着岸一卷之覺書』과 安龍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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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最終更新:2009-08-23 08: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