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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4월 18일(대전일보,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신라의 천하사상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은 『삼국사기』를 통해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음에도, 그곳에 독도라는 직접적인 표현이 없다는 것을 이유로, 독도를 이야기하면서 그 기록을 제외하는 경우가 많다. 그 기록에는 우산국의 다른 이름으로 울릉도가 소개되어 있는데, 일본은 그것을 근거로 우산국과 울릉도를 같은 곳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국」과 「도」는 같은 단위로 보기보다는 「국」이 「도」를 포함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 기록에 의하면, 우산국은 한 번 이상 신라의 침략을 격퇴했는데 그것은 우산국이 그 정도로 강한 나라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은 우산국이 울릉도와 그 주변의 섬들을 통합하여 건국된 나라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라도 우산국의 그러한 실체를 인정했기에 「국」으로 호칭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신라 중심의 기록이기 때문에 우산국은 비하되어, 그것을 읽어도 그 실체를 간과하기 쉬우나 신라와의 관계를 통해 우산국에 포함된 독도를 확인할 수 있다.
하늘에서 내려온 박혁거세가 신라를 세우는 것은, 신라가 박혁거세를 통하여 천과 혈연관계를 맺는 일로, 신라가 하늘의 뜻에 따라 통치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늘은 후손을 하강시켜 신라를 건국하는 것으로 지상을 천의 질서에 포함시킨 것이다. 그것으로 신라왕은 천손이라는 혈연으로 천하를 통치할 자격을 획득하고, 그 왕이 통치하는 신라는 천하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확인해주는 것이 신라의 건국신화다.
천하의 중심에 위치하며 천하를 주재하는 나라는 하늘의 질서를 주변으로 확산시켜야 한다는 의무를 지고, 주변국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조공을 바쳐야 한다. 주변국이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하늘의 뜻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에, 천하의 주재국은 침략을 통해서라도 그 관계를 성립시켜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이루어진 것이 신라의 우산국 정벌이었다.
신라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사실은 박혁거세와 천과의 혈연관계 이외에도, 신라가 동서남북의 한 가운데에 존재한다는 지리적 조건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박혁거세는 하늘에서 내려와 이미 세력을 이루고 있던 육 촌장을 통합하여 건국하면서부터 천하의 통치자로 군림했는데, 신라는 현실적으로도 남쪽의 가야, 서쪽의 백제, 북쪽의 고구려와 국경을 접하고, 바다 동쪽에는 왜를 두고 있었다. 이것은 사방이 적대세력에게 포위되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나 중심에 위치하며 천하를 지배한다는 관념을 가질 수도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신라의 동방에 대한 자세는 다른 3방의 그것과는 전혀 다르다. 서・남・북방과의 교류는 정벌하여 복속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공방전을 되풀이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동방과의 교류에는 그러한 의지와 자세가 보이지 않는다. 동방에 유일하게 존재하는 왜에 대한 신라의 자세는 부정적으로, 침략을 받으면 격퇴하는 형식이다. 혼인을 맺은 일도 있었으나, 그것은 왜의 요구를 수용한 것에 불과했다. 그것도 결국에는 신라가 거절하고, 왜가 이를 빌미로 침략해오고, 신라는 그것을 격퇴하고 만다.
그 같은 왜에 대한 자세는 사방의 동방을 결락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데, 그것은 천하사상 성립의 문제였다. 원래 천하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전에는 「사방」이라는 용어가 대신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에 「사방」에서 동방이 결락되는 것은 천하에 결손이 생기는 일로 방치할 수 없는 일이다. 왜를 제외하여 결락된 동방을 보완해야 했다. 그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우산국의 정벌이었다.
이 신라의 천하 사상을 근거로 신라와 우산국의 관계를 살펴보면, 신라에 대항하는 우산국의 천하 사상도 추정할 수 있고, 독도를 포함하는 우산국의 실체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우산국은 신라에 복속되고 말지만, 그 전까지는 신라의 침략을 물리치며 저항하고 있었다. 그것은 우산국이 그럴만한 국력을 축적하고 체제도 정비하고 있었다는 것으로, 우산국이 독자질서로 통치되는 나라였기에 신라를 거부하며 저항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신라질서에 대응하는 우산국의 독자적 가치관, 예를 들자면 태양이나 거석을 숭배하는 종교적 사상과 의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4월 25일(대전일보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태양숭배와 독도
고대인들은 자연을 뜻대로 조절할 목적으로 그것을 숭배하고 감사하는 의례를 거행했다. 풍작을 빌고 감사하는 의례를 통해 영원히 수호 받고자 주력이 있다고 믿는 자연물을 신앙의 대상으로 해서 소원을 성취하려는 노력이었다. 이때 숭배의 대상으로 군림하는 것이 태양이나 거석・거목 등이었다.
태양숭배는 공통적 가치관으로 우리는 백의민족이라 자처할 만큼 흰색을 좋아하는데 그 백색이 태양을 상징한다. 조석으로 붉은 빛을 발하다 낮에는 백색을 발하는 것이 태양이다. 그래서 태백산, 백두산, 백마강 등의 산천 이름에도 백이 즐겨 사용되었다.
그 사고를 반영한 것이 건국신화다. 그곳의 시조들은 천과 혈연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를 통해 후손들은 태양의 후예가 된다. 단군은 환웅의 아들로 태어나 조선을 건국했고, 고구려는 천제를 부로 하는 추모가 건국했으며, 신라는 하늘에서 내려온 박혁거세가 건국했다. 이 경우의 시조들은 인격화된 태양이다. 태양의 광열이 대지를 풍요롭게 하는 원천이다. 그래서 그것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고 그것과의 혈연으로 그 수호를 보장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것이 고대의 공통된 사상임을 생각하면 우산국도 그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산국의 태양숭배를 기록으로는 확인할 방법이 없으나 망망대해 속에 존재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우산국의 태양숭배는 추정할 수 있는 일이다.
울릉도와 독도는 93킬로미터 떨어져 마주한다. 결코 가까운 거리는 아니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바람 부는 맑은 날에 볼 수 있다」라는 우리의 기록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망망대해라는 것을 감안하면 멀다 해도 이웃 섬에 불과하다. 또 육안으로 확인되는 거리다. 배를 조금 저어가거나 고지에 서면 확인할 수 있는 거리다. 그런 상황에서 우산국 사람들이 독도를 바라보는 마음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독도 위로 떠오르는 태양이 바다와 어우러져 빚어내는 정경을 보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를 아는 것은 독도와 우산국의 관계를 아는 중요한 조건이다.
512년 이전 사람들의 자연숭배 사상을 생각하면 단순히 자연의 정경으로 보고 만다는 일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태양은 태양대로 거암은 그것대로 조상의 영혼이나 정령이 깃들어 있다고 믿는 대상이었다. 그것이 바다와 어우러져 이루어내는 신비한 정경을 보고 그것을 독점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졌기 마련이다.
이미 우산국 사람들은 태양이 없을 때 나타나는 폭풍이나 어둠이 초래하는 재난을 통해 태양의 은덕을 알고 있었다. 그 태양이 자국의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 바다로 지고 있었다. 다시 말하자면 자국을 중심으로 뜨고 지는 태양이었다. 자신들이 태양을 독점한다고 인식하기에 충분한 조건이었다. 그것을 숭배하고 그것의 수호를 감사하는 의례를 거행한다는 것은 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태양의 수호를 독점한다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는 천하사상도 구축했을 것이다. 그것이 신라에 대항하는 국력으로 나타난 것이라 하겠다.
독도와 우산국의 관계는 독도를 태양의 거주지로 보는 인식을 통해서도 생각해볼 문제다. 태양이 거목이나 거석을 주거로 한다는 것이 고대인들의 사고였다. 중국의 『회남자』가 이야기하는 태양은 10개였다. 열 개의 태양이 부상이라는 나무 아래에서 대기하다 차례로 떠올랐다 서쪽으로 진 후에 다시 그 나무 아래로 가서 9일간 휴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그 거목의 역할을 하는 것이 독도였다. 우산국 사람들이 보는 태양은 하루의 일정을 마친 다음에 주거지 독도에서 휴식을 취하고, 다음날 아침에 다시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처럼 자신들이 절대적 존재인 태양의 거주지 독도를 자기들 영역에서 제외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일본은 독도에는 경제적 가치가 없어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는 달랐다. 조선 시대에는 공도정책을 취한 일도 있었으나 그것은 경제가 아닌 관리의 문제였다. 경제적 가치를 알면서도 자국민의 안전을 위해 공도정책을 취한 것이다. 인식 그 자체가 달랐다. 우산국은 국가 구성의 요소로 신라는 천하의 구성요소로 보고 있었다.
2007년5월1일, 대전일보,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우산국의 거석숭배
일본은 합의를 저버리고 울릉도의 소유를 주장하다 깨닫고 철회한 일이 있다. 조선 숙종 때의 일이다. 그 일본이 지금은 독도를 우산국에서 분리시키며 그 소유를 주장한다. 우리가 그 존재를 알지 못하다가 일본을 통해 겨우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울릉도에서 독도가 보인다는 기록을 부정하는데 수학공식까지 동원했다. 그러다 육안으로 독도가 확인되자 숲에 가리면 볼 수 없다거나 일부러 고지에 올라갔을 리 없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우산국이 독도를 인식한 이상 그 소유를 부정하지 않는 한 그것은 우산국의 영유일 수밖에 없다. 경쟁자도 없는 상황에서 신라와의 전쟁도 사양하지 않던 우산국이 그 소유를 부정했을 리 없어, 인식한 순간부터 우산국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종교적 가치를 보아도 독도는 우산국에 속한다. 독도는 태양의 거주지로 인식하고 숭배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거암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에서도 신앙의 대상이었다.
바다를 터전으로 하는 사람들은 판자 한 장을 사이로 생사를 달리 하므로 신에 의지하려는 마음이 강하고 자연의 변화에 민감했다. 자신들의 생사도 신의 뜻으로 여기며 그것에 감사하는 의례를 지낸다. 그들은 산정으로 지는 별도 신의 강림으로 보았다. 그런 사고가 거목이나 거암을 신의 거처로 여기고 그것을 숭배케 한다. 인류 공통의 의례라 할 것이다. 신이 강림하는 곳이기에 영지로 여기고 그것의 수호를 기원하며 제사한 것이다. 바다 가운데 고고하게 솟은 독도는 두 개의 바위섬과 수십 개의 작은 암초로 이루어져 있다. 고산이나 거목・거암이 의미하는 신의 거처・통로로 믿기에 충분했다. 인간이 된 웅녀가 나무아래에서 짝을 이룰 남자를 원하여 환웅을 만난 것처럼 신에게 의사를 전하는 통로로 본 것이다.
독도는 계속해서 변하며 신비스러워진다. 쉴 새 없는 여울의 침식이 곳곳에 동굴을 파내고 풍랑은 계속해서 씻어내어 조금의 토양도 머물지 못하게 하며 모든 연안을 단애절벽으로 화생시킨다. 끊임없는 반복으로 섬에 생명을 불어넣으며 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여울과 풍랑의 정화가 생명을 창조해내는 화생이었다. 박혁거세와 같은 날 계룡의 갈비에서 태어난 알영의 입은 닭의 입부리와 같았다. 그래서 냇물에 목욕시켰더니 그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물의 정화에 의한 결과였다. 그것을 연상케 하는 독도의 여울과 풍랑이다.
원래 동굴은 자궁을 의미하고 최고의 신이 태어나는 모태로 여겨졌다. 천계, 지계, 명계의 우주관에서 동굴을 생각하면 그것은 산정에 있건 평지에 있건 해중에 있건 위치의 고저와 상관없이 모신의 자궁으로 여겨진다. 도교에서는 천상의 궁전에 사는 신들이 때때로 산정의 동굴로 내려가는 것을 이야기 한다. 신의 거처로서의 동굴이다. 달걀모양을 한 동굴의 형상에서 알을 깨고 나오는 새 생명의 탄생을 연상한 것이다.
인간이 되고 싶은 곰은 환웅의 이야기를 듣고 동굴에 칩거했다 나오는 방법으로 소원을 성취했다. 동굴의 주력에 의한 화생이었다. 알에서 신이 태어나는 것은 이상출생으로 신성성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많은 시조가 알에서 태어난다. 추모왕은 천제와 하백여랑의 신혼의 결과로 나타난 알에서 태어났고, 박혁거세는 백마가 하늘에서 운반해온 알에서 태어났다. 백제나 가야의 시조도 난생의 신화를 갖는다. 독도의 곳곳에는 이러한 신화가 스며있다.
뿐만 아니다. 검푸른 심해와 그 밑에 불규칙하게 솟은 암초나 연안의 단애절벽은 그곳으로의 접근을 어렵게 한다. 신의 강림을 대비하며 외부의 접근을 금하는 것 같다. 환웅은 태백산의 신단수로, 수로왕은 구지봉으로 강림했는데, 모두가 독도처럼 하늘을 향해 솟은 곳이었다. 하늘을 향한 고립은 스스로를 성스럽게 한다. 신전에 보관된 비서나 심산에 은거하는 도인처럼 격리되어 신성해지는 것이다.
우산국은 독도를 신앙의 대상으로 해서 지도자는 통치의 정통성을 확보하고 인민들은 그것에 수호 된다는 사실에 자긍심을 가질 수 있다. 또 그것으로 나라의 동질성을 확보하고 신라와 대전하고 있었다. 그러한 우산국이 독도를 자국의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제외할 이유가 어디에 있겠는가.
2007년5월9일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우산국의 종교
『삼국사기』에 우산국과 독도의 관계가 명기되지 않은 것을, 일본은 우리가 독도를 인지하지 못했다는 증거로 삼으려 한다. 알지 못하다 일본을 통해 겨우 알았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서인 『고사기』나 『일본서기』가 일본의 모든 영토를 언급하지 않았다 해서 그곳에 누락된 곳을 영토에서 제외시키지는 않는다. 우산국의 기록도 그런 식으로 이해할 수 있음에도 제국주의적 발상은 그런 여유를 가지지 못한다. 울릉도 곁에는 여러 섬이 있는데 『삼국사기』는 그것도 명기하지 않았다. 일본의 발상이라면 그것도 무소유지여야 한다. 꼭 기록되어야 영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다녀오는 것만으로 영지가 되는 것이다.
『삼국사기』가 우산국의 영지로 독도를 명기했으면 문제가 없었을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 구차한 구실을 만들어 문제를 일으켰을 일본이다. 우리와 공유하는 바다를 일본해로 부르는 오만이나 울릉도와 독도를 분명히 언급하고 있는 기록을 왜곡하려는 독선, 정신대 문제를 미국과 해결하려는 오기 등이 그 증거다.
일본의 인문학은 독자적이고 수준이 높다.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고 자국역사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을 발판으로 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 학문을 그대로 활용하면 독도가 왜 일본 것이 아니고 우리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일본이다. 냉정해지려는 일본인도 있으나 민족적 격랑에 함몰될까 우려된다.
독도가 태양의 거주지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생각하면 우산국의 영역에서 제외될 이유가 없을 뿐 아니라 정령의 거처로 믿고 숭상하는 거석숭배사상으로 보아도 독도는 우산국의 구성요소였다. 독도를 경험한 자들은 그 기묘한 형상이나 바다와 거암이 빚어내는 정경의 신성함을 이야기 한다. 신성의 경지를 넘어 종교의 두려움을 느낄 정도라 한다.
독도가 종교의 대상으로 군림했을 가능성은 우산국의 종교의식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종교라는 직접적 표현은 없으나 전체적인 흐름에서 종교적 두려움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은 있다. 우산국 정벌에 실패한 신라가 이사부에게 그 임무를 맡기자 그는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우산국 사람들을 위협했다. 우산국 사람들은 그것이 두려워 항복했다는 것이다. 나무로 만든 사자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로 어리석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이다. 그것은 신라의 정통성을 이야기하기 위해 우산국을 경시한 기록이다. 우산국을 경시하여 신라를 높이는 방법인데, 나무사자의 진위도 구별하지 못할 정도의 상대였다면 그 정벌에 신라가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볼 일은 그들이 사자의 무엇을 무서워했을까이다. 과연 나무로 만든 사자의 외형을 두려워했을까. 얼마나 정교한 외형이었기에 그것이 무서워 항복했을까.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자를 두려워했다면 그것을 경험한 일이 있어야 하는데 사자는 인도에나 있는 맹수여서 경험했을 리 없고, 경험이 없으니 무서워했을 리도 없다.
그런데도 나무사자를 무서워했다면 그것은 그 외형이 아니라 그것이 상징하는 재앙이었을 것이다. 우산국 사람들은 외국과 교류하며 사자를 중심으로 하는 종교적 주력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영혼을 운반하며 재앙과 수호가 동시에 가능한 상상의 동물로 인지하는 경험이었다. 실제로 사자는 문주보살을 보필하는 성수로 알려져 있었다.
사자를 매개로 하는 삼국시대의 문화는 일본의 기록을 통해 확인 가능하다. 백제의 미마지(味摩之)가 일본에 전한 기악(伎樂)이라는 가면무용이 있는데 그 속에 사자탈이 있었다. 또 시라기시시(新羅獅子)와 코마시시(高麗獅子)라는 용어와 형상으로 신라와 고구려의 문화가 전해지고 있다. 사자춤이라는 형태로 전해지며 민속예술로 각광을 받기도 한다. 사자를 매개로 하는 문화가 삼국에 존재했으며 우산국도 그것을 경험했었다는 것을 추정하기에 충분한 증거자료라 할 것이다. 우산국은 그 사자의 종교적 재앙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기존에 신앙하던 대상보다 강력한 주력을 발휘한다고 믿는 사자를, 신라는 정벌의 도구로 동원했고, 우산국은 신라의 그 전략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2007년 5월 15일 대전일보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사자와 우산국
우산국이 나무사자를 보고 항복했다는 것은 그것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인도에나 존재하는 맹수를 그들이 직접 경험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신라군을 격퇴시켰던 용사들이 그것이 무서워 항복했다는 것을 근거로 하면 문화를 통한 경험 같은 것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사자의 무엇을 두려워 했는가다. 그 외형이었을까, 아니면 그것의 주적 능력이었을까.
『삼국사기』의 표현대로 그들이 우한(愚悍)했다면 나무사자를 무서워했을 리 없다. 오히려 그 이상한 형상에 흥분되어 설치고 날뛰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무사자가 두려워 항복했다면 그 이전에 사자를 경험하여 그것의 무서움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인류가 사자를 두려워하는 것은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사나운 맹수로서의 사자와 성수로서의 사자다. 우산국이 섬나라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자를 직접 경험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우산국의 사자경험은 문화교류를 통한 것으로 성수로 인식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경험해야 두려움도 안다는 것은 신화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삼국유사』의 해모수가 자신이 천제의 아들이라는 신분을 밝히며 하백의 딸 유화와의 교제를 요구했으나 하백은 허가하지 않았다. 이는 천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일로, 천제를 경험한 일이 없어 그 절대권위를 몰랐기 때문이다. 하백이 그 권위를 알게 된 것은 자신이 잉어, 꿩 등으로 화생하는 것에 비해 해모수가 수달, 매 등으로 화생하는 우위의 능력을 경험한 뒤부터였다.
『고사기』에도 천신과 지신의 우위경쟁이 있다. 천신이 지상을 통치자로 군림하려 하자 지상신들은 크게 반발하고 대항했다. 하늘에서 3회나 사자를 파견하여 우위의 능력을 보이자 지상신들은 그것을 확인하고 천손을 통치자로 받아들였다. 우산국의 항복도 이런 차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자가 삼국은 물론 중국에도 없었다는 사실에 사고를 고정하면 우산국의 사자 경험은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산국 사람들의 반응을 근거로 하면 그들이 사자를 경험한 것이 된다. 우산국의 사자 경험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는 없으나 일본에 전래된 삼국의 사자의 인식이나 그 문화를 통해서 추정할 수는 있다.
전한 이전의 중국의 사자 인식은 호랑이나 표범을 잡아먹으며 하루에 500 리를 달리는 공상의 맹수였다. 그러다 월씨가 한무제에게 사자를 바치는 것을 계기로 경험하게 되는데, 머리는 개를 닮고 형상은 늑대를 닮은 황갈색의 맹수였다. 그 소리가 어찌 컸던지 모든 동물이 두려워했고 백수의 왕이라는 호랑이도 눈을 감았다 한다. 곤륜에서 태어 나 기를 먹고 이슬을 마시는 동물로 인식했다. 그 후에 사자는 날개를 달고 날며 포효하는 형태로 인식되어지며 인간의 영혼을 영계로 인도하거나 사악한 존재를 물리쳐주는 성수로 여기게 되었다.
결국에는 불교의 삼존불상의 하나인 문주보살을 태우고 다니는 성수로서의 위치를 확보하여 신앙의 대상이 된다. 지혜를 상징하는 문주보살과 리법의 보현보살은 사자와 코끼리를 타고 석가의 좌우를 수행한다. 벽화 등에 흔히 나타나는 삼존불상이다. 우산국 사람들이 사자에 대한 인식도 이런 범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일본에서 발견된 칼자루에 장식된 고구려사자(高麗犬)는 무섭게 포효하며 용맹해지려는 욕구와 그것의 수호를 기원하는 무사의 기원을 듣고 있는 듯하다. 신라사자(新羅狛)는 손과 발에도 머리를 달고 그 용맹을 피력하고 있으며 백제에서 전래된 사자탈은 떡 벌어지게 웃으며 사람들을 영계로 안내하려는 듯 열심히 머리를 흔든다.
아시아인의 다신교적 정신구조나 기반 속에서는 사자는 신이고 정령이었다. 혹은 그것들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상징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사자의 초자연적 영력에 수호 받고자 했다. 사자춤을 즐기는 사람들은 그것은 통해 초월적인 세계를 접하여 신들의 은총이나 가호를 얻을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우산국의 사자인식도 그 범위의 것이었다. 그러한 인식이, 나무사자를 보이며 위협하는 신라의 전법에 속아 넘어가게 한 원인이었다.
2007년 5월 21일 대일논단
측은한 일본
요즘 세간의 화제는 애정 많은 어느 재벌의 부자유친이다. 아들이 맞고 돌아오자 아버지가 직접 응징했다는 눈물 나는 이야기다.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 된다 상식을 몸으로 실현한 것이다. 문제가 커지자 아버지는 발군의 능력을 동원하여 법의 굴레를 초월하려 몸부림을 치나 초라하다. 머리만 좋아 시대를 풍미했던 지향성 법가들을 동원하여 변명하는 것 까지는 세태의 흐름으로 돌릴 수도 있으나 부자가 상의한 듯한 진술에는 모골이 송연해진다. 마치 일본의 가증스런 자기변명을 보는 것 같아 측은하기 조차하다.
그 부자가 같이 앉아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무슨 말을 했을까. 사실을 말하라고 했을까. 어떤 방법으로든 상황을 극복하는 것이 사나이의 용기라고 말했을까. 용기가 무엇인가를 알려주기 위해 행동한 것이라면 지금이 그 모범을 보일 좋은 기회가 아닐까. 아버지의 사랑, 남자의 용기가 무엇인가를 보여줄 때다. 늦었으나 그래도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일 것이다. 범죄를 범하고도 반성의 용기를 가지지 못해, 선진 지식과 축적된 국력을 동원하여 구차한 변명만 늘어놓으며 나락으로 빠지려는 일본을 보는 것 같다.
옛날에 아버지와 언쟁했다는 친구의 술 상대를 한 일이 있다. 그가 비정상적인 수입을 올릴 수도 있음에도 나름의 원칙을 지키고 살았더니, 아버지가 비웃기에 말대꾸를 하고 나왔다며 밤들이 마셔대는 것이었다. 일본의 평화 기준은 너무나 자의적이다. 모든 것을 상황논리로 자국민까지 속이고 있다.
우리는 일본 사람들이 예의바르고 친절하다고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 면이 없지 않아 있다. 그래서 일본인은 정직하고 화도 안내는 사람들로 착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들만을 위한 친절이고 살아가는 방법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자신을 보호하고 우월감을 확인하는 방법이라면 그것이 타자를 향할 경우에는 심한 편견과 차별로 나타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배타적인 것이 아닐 때 비로소 아름다운 사랑을 맺어내는 것이다.
최근 일본은 [독도는 과거에도 일본 것, 현재도 일본 것]이라는 식의 표어로 공동목표를 설정하여 결속을 다지고 있다 한다. 그것이 진정한 애국심의 실현이라고 믿는 자도 많을 것이다. 그들은 필시 [한국은,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지 않는가]라며, 그것을 지적하는 우리를 편협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지 않다. 방법이 같다 해서 의미도 같은 것은 아니다. 독도가 우리 것이 분명한 이상, 그것을 노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일본이 침략의 논리를 근거로, 억지를 정당화하려는 것은, 범죄를 합리화하려는 일이기 때문에 차원이 다르다.
일본이 예의가 바를지 모른다 해서 그들이 자국의 치부를 아는 것은 아니다. 그저 맹목적으로 정부의 말을 믿고 따르며 그것으로 피해를 보는 상대의 입장에도 침묵하는 것을 정부에 대한 예의로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과거 침략시대의 일본인 보다, 지금 현재의 자신들이 훨씬 호전적으로 변해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는 것일까. 측은하고 분통이 터지는 이야기다. 그들은 자신들이 싸움을 걸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듯하다.
일본은 독도가 자기 땅이라고 증명해줄 수 있는 기록을 가지지 못한다. 많은 기록이 있다고 자랑하지만, 일본 땅이 아니라는 것을 반증해주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우리의 기록을 증거로 삼으려 한다. 많은 기록을 더듬어 그것들이 보이는 모순점을 찾아 기록 자체를 부정하려한다. 그렇게 해서 독도를 무소유지로 만들어, 1905년의 제국주의의 침략을 정당화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 부정의 방법이 교묘하다. 어렵다고 생각되는 자료를 짜깁기하여 자기들의 의도에 맞추는 것이기 때문에, 언뜻 보기에는 그럴싸하여 겁을 먹을 수도 있다. 그것이 오도된 결과라는 것을 아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전문가의 해설이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많은 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하다. 우리의 역사 기록이, 우리의 용어가 타민족에 의해 왜곡되려 한다. 지금은 나라를 빼앗긴 시대도 아니다. 또 그것을 간파할 안식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방관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측은한 일이다.
2007년 5월 23일대전일보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우릉도의 오랑케(島夷)
독도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이어 삼국유사에도 있다. 모두 고려시대의 기록이나 삼국시대를 이야기한다. 비슷한 내용이나, 이사부를 박이종으로 기록하는 것과 같은 차이는 있다. 19세기 말, 단군신화의 허구라고 비웃으면서 자국의 신화는 사실인양 찬양했던 일본은, 이를 근거로 그 기록을 신뢰할 수 없다고 주장할 지도 모른다. 실제로 일본은 우리가 19세기까지는 독도를 알지 못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슬라주 동쪽 바다에 순풍으로 이틀 걸리는 곳에 우릉도가 있다. 지금의 우릉이다. 이 섬에 사는 오랑케(夷)는 물이 깊은 것을 믿고 교만하여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 그래서 신라왕의 명을 받은 박이종이 나무사자를 싣고 가서,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놓아버리겠다 라고 위협했다. 그러자 오랑케들이 두려워하며 항복했다]는 내용이다.
이것 역시 신라중심의 기록이라 우산국을 오랑케의 나라, 신라에 복속될 나라로 했다. 그러나 우산국 입장에서 기록한 것이라면 오히려 신라를 오랑케로 했을 것이다.
원래 [이]는 천하사상에서 사용되는 문자로, 자국이 천하의 중심임을 확인하기 위해 타국을 무시하는 문자다. 문자의 차별로 자기를 스스로 높이는 것이다. 상대가 예를 모르는 [이]라서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때려도 좋다는 사고다. 침략을 정당화하는 강대국의 사고가 반영된 문자다.
그런데 우산국을 [이]로 지칭한 신라야말로 고구려에게 [이]로 취급 받던 나라였다. 충북 중원군에 중원고구려비가 있다. 그것은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관념을, 신라왕과 그 신하들에게 의복 등을 하사하는 방법으로 실행하고 확인하는 기념비다. 그곳의 고구려는 신라를 [동이], 그 왕을 매금이라 부르며 차별하고 있다. 원래 매금은 마립간의 다른 이름이라 천칭이라 할 수 없으나, 고구려왕을 대왕으로 칭하며 신라왕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호칭에 의한 차별이다. 그것도 동이로 수식하여 [동이매금]으로 칭한 것에는 신라를 차별하려는 고구려의 의도가 확실히 나타나 있다. 이 같은 문자의 차별은 상대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필요하면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다. 신라를 동이라 했던 고구려도 실은 [이]로 구별되고 있었다.
많은 중국 기록이, 중국에 조공하여 작위와 의복을 하사받는 고구려를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삼국사기의 기록에도 있는 이야기다. 물론 그것이 [이]로 구별된 나라의 실체를 반영하는 것은 아니다. 기록하는 측의 관념을 바탕으로 하는 기록일 뿐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나라이건 나라로 존재하는 한 자국을 천하의 중심으로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 주변국을 자국이 통치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려 했다는 것이다. 신라가 우릉도를 [도이]라 칭한 것도 그런 의미에서 이해할 문제다. 신라는 그곳을 정벌할 명분 상 [도이]로 칭한 것이다. 그 용어가 우산국의 실상을 반영한 것은 아니다.
중국이 고구려를 필요로 했기에 애써 동이라 칭했고, 고구려 또한 신라를 필요로 해서 동이로 칭했다. 자국의 질서 속에 포함시키고 싶은 욕망의 반영이다. 신라도 우산국을 자국의 질서 안에 포함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경제적 문제가 아니라 종교적 문제, 천하사상의 문제였다. 또 우산국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었다. 고구려가 중국에게, 신라가 고구려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듯, 우산국도 신라에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신라가 필요로 하는 나라였으나, 뜻대로 복속시킬 수 없는 상대, 이미 정벌을 시도했다 실패한 경험이 있는 나라, 그래서 나무로 사자를 만들어 위협해야 할 정도로 상대하기 어려운 나라로서의 우산국이었다. 우산국은 신라와 대등하게 대적할 만큼 독자적이고 국력이 충실한 나라였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와 달리 [우산국]이 아닌 [우릉도]로 칭하고 있으나, 우릉도에서 독도가 보이는 이상, 우릉도로 호칭된 나라에는 독도가 포함되어 당연하다. 국호 대신에 도성이나 지명을 사용한다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이다. 그것이 두 기록이 우산국의 다른 이름인 울릉도와 고려시대의 지명 우릉을 같이 기록한 이유였다.
2007,5,30,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자료의 공유와 해석
기록에는 공론을 거치거나 상대와 합의한 것이 있는가 하면 일방적인 것도 있다. 일본의 『일본서기』는 우리의 허가 없이 우리의 이야기를 일방적으로 윤색한 기록물이다. 그래서 기록 그대로를 믿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기록 중에도 패망한 나라의 기록에는 자의적인 것으로 보이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기록은 검증을 필요로 한다. 독도를 탐하는 일본은 우리의 기록도 철저히 검토하고 그 허점을 기반으로 주장의 당위성을 확보하려 한다. 그 치밀한 노력에 겁을 내는 사람도 있으나, 진실을 떠난 웅변이기에 공허하다.
일본이 우리의 자료를 활용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다. 한문과 한글을 이해하면 쉽게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일본 자료는 한문과 일본어의 능력이 있어도 어렵다. 일본 특유의 표기가 있어 도움을 받거나 그들이 작업한 것을 인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학습하면 읽지 못할 것도 없지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 자료를 공유하려는 학자가 나타나면 존경심까지 솟는다.
우리는 비교적 우리와 비슷한 주장을 하는 일본인을 양심적이라거나 친한 인사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나 맞는 말도 아니다. 그들은 많은 자료를 섭렵했기 때문에 학문에 충실한 것일 뿐이다. 특별히 한국이 좋다거나 양심적이라서가 아니다. 하긴 자료가 있어도 숨기거나 왜곡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훌륭하다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조선 숙종 때의 일이다.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일하다 납치당해 에도까지 끌려갔다가 그곳에서 장군을 만나 울릉도가 조선 영토임을 주장하고, 그것을 인정하는 증서를 받아 귀국하는 도중에 대마도에서 빼앗겼다 한다. 그러나 일본은 그것을 부정하며 안용복을 범죄자로 몰고, 그것을 기록한 우리의 사서를 부정하려 한다. 그 중에는 많은 자료를 인용하여 진실처럼 보이는 것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안용복이 범죄자라는 것은 생각해볼 문제다. 과연 안용복이 범죄자일까. 남의 나라에 들어와 납치해간 자들과 납치당해 끌려간 사람 중에 누가 범죄자인가. 안용복이 범죄자라면 조선의 법을 어긴 조선의 범죄자일지는 몰라도 일본인에게 납치당해도 좋은 일본은 범죄자는 아닐 것 같다. 그런데 일본은 무엇을 근거로 하는지 안용복을 범죄자로 몰고 있다. 조선은 왜구와 같은 외적으로부터 국민을 보호기 위해 울릉도 출입을 금하는 공도정책을 펴고 있었다. 일본은 그 사이에 70년여 년이나 밀렵을 하다 안용복을 납치한 것이다.
그들이 기록한 「죽도도해유래기발서공」이라는 책에 안용복을 납치하여 에도로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을 일본인들이 보지 못했을 리 없음에도 안용복이 에도에 간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안용복이 에도에 갔느냐의 여부는 중요한 문제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일본이 독도가 한국령이 아니라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인지 안용복의 에도에 간 기록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있다. 보지 못해 말을 안 하는 것과 보고도 말을 하지 않는 것은 다르다. 보고도 이로울 것이 없어 침묵하는 것이라면 옳지 않다.
자료의 은폐라고 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자료의 은폐라는 것이 한 쪽의 의도로 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것을 발견하지 못한 책임도 크다 할 것이다. 일본은 왜 그것을 공론화하지 않았고, 우리는 어째서 그것의 확인에 소홀했을까.
기록은 어떻게 해석하는가가 중요하다. 보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도 달라지기 때문이다. 아무리 좋은 자료를 가지고 있어도 그 의미를 알지 못하면 가지지 못한 것과 다를 것이 없다. 돼지에 진주다. 예를 들자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과 같은 자료다. 그것이 기록으로 말하는 의미를 제대로 해석하면 일본의 독도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 일본은 독도가 일본 것이라는 것을 증명해주는 기록이 많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그것들을 잘 읽어 보면 독도가 일본의 땅이 아니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이 과시하는 『은주시청합기』・『죽도도해기유래기발서공』・『죽도고』 등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2007년6월5일 대전일보 [권오엽교수의 독도이야기]
은주시청합기
일본은 마치 독도가 일본의 영토임을 증명해주는 기록이 많은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 첫 번째로 드는 것이 『은주시청합기』라는 책이다. 은주는 일본 서쪽에 있는 섬으로, 우리나라 동쪽에 있는 울릉도와 대칭하는 섬이다. 독도를 사이에 두고 울릉도와 은주가 마주보고 있는 셈이다. 오키라고도 한다. 울릉도보다 훨씬 큰 이 섬은 도전과 도후로 구성되어, 일본에서 독도에 오려면 시마네에서 은주의 도전을 거쳐, 도후의 복포라는 곳에서 배를 저어야 했다.
『은주시청합기』는 은주의 자연, 산물, 전설 등을 기록한 일종의 풍토지였다. 은주의 통치를 위임받은 대관이 섬을 순시하며 들은 이야기와 지리적 특성을 모아 정리한 것이다. 그곳은 막부의 직할지로, 막부의 임명을 받은 대관이 원주인에게 섬의 상황을 설명할 풍토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세금을 거두는 자료로 활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그곳에는 「은주는 일본의 북해(당시의 일본은 동해를 일본해가 아닌 북해로 부르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표현)에 있다. 이곳에서 북서쪽으로 이틀 하룻밤을 가면 송도가 있고, 다시 하루 정도를 배저어가면 죽도가 있다. 이 섬은 사람이 살지 않는 무인의 땅이다. 이곳에서 고려를 보는 것은 운주(일본의 육지)에서 은주를 보는 것과 같다. 이렇게 보면 일본인이 사는 서북의 토지, 국경의 끝이란 이 주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을 일본인이 사는 한계로 한다」라는 내용의 기록이 있다. 일본은 이것을 근거로 울릉도와 독도의 소유를 주장하고 있었다.
정확한 판단을 위해 원문 「此二島無人之地 見高麗如自雲州望隱岐 然則日本之乾地 以此州爲限矣」를 소개한다. 앞의 해석을 참조하며 천천히 읽어보면 무슨 의미인지 대충은 짐작이 갈 것이다. 좀 더 설명한다면, 일본에서 「은주」를 보는 것은, 「울릉도」에서 조선을 보는 것과 같아, 이 「주」를 일본의 국경으로 한다는 것이다. 이때의 「주」가 무엇을 의미하느냐가 갈림길이다. 은주를 가리키느냐 울릉도를 가리키느냐의 문제였다. 간단한 문장이지만 선입관이나 편견이 들어가면 해석이 복잡해지는 모양이다.
신용하교수는 이것을 「일본의 서북경계는 은주로써 한계를 삼는다고 썼고, 송도/독도와 죽도/울릉도의 위치를 정확하게 서술하면서 이를 고려(조선)의 영토라고 기록했다」고 해석했다. 독도와 울릉도를 우리 땅으로 기록한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에 반대하는 일본인 중의 한 사람인 시모조는, 사료는 전체를 보고 읽어야 한다는 원칙을 이야기하여, 마치 신용하 교수나 한국 연구자들이 사료의 해석을 잘못한 것처럼 전제하고, 에도(동경)를 중심으로 하면 은주는 서에 해당하므로, 그것을 서북으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는 주장을 했다. 구체적으로 방위를 설명한 이야기라 객관적인 사실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은주는 일본의 서북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시모조는 또 『일본서기』에 나오는 「이소타케루」라는 신의 이름과 울릉도의 또 다른 이름 「이소타케시마」의 음이 닮은 것을 근거로, 섬의 이름이 일본신의 이름과 비슷하므로 울릉도가 일본땅이라는 식의 주장도 폈다. 이것도 틀린 이야기다.
시모조는 한남대학교에서 일본 강의를 하다 돌아간 사람이라 한국에 대한 지식이 아주 풍부하다. 공부도 많이 한 것 같다. 그런데 응용의 방법 역시 문제가 많다.
타가와라는 자는 더 이상하다. 그는 한국학자들의 해석이 틀렸다며, 멋대로 문자를 첨가하면서, 울릉도가 일본땅이라는 해석을 이끌어 냈다. 「도」와 「주」가 같다는 것이 근거다. 많은 자료에서 용례를 찾아 증명했지만, 편의적인 논증으로 잘못된 방법이었다. 원문이 은주의 「주」와 울릉도의 「도」를 구별하고 있는데, 그 「주」와 「도」를 같은 공간으로 단정하고 울릉도를 은주에 소속시켜버린다.
최근에는 그것을 보다 못한 일본인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심적이거나 친한적인 학자들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하는 학자들이 기록과 다른 해석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영토의식을 기반으로 하는 주장이 부정당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 기록은 곳곳에서 울릉도가 일본령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성격이 좀 다른 이야기지만, 1882년에 만주의 집안에서 광개토왕비가 발견되었다. 그 비에 새겨진 비문이 1883년에 일본에 유입되고, 그해에 연구논문이 나왔다. 우리나라는 그것의 존재도 모르고, 임오군란이네, 갑십정변이네 하며 정권쟁취에 여념이 없었다. 생각해볼 일이다. 일본이 왜 그토록 서둘러 비문을 입수하고, 그 연구에 힘을 기울였을까. 그것도 육군 참모본부가 학자들을 동원하며 그 연구를 서두르고 있었다. 그곳에 모두가 알고 있는 문장이 있다. 일본인들의 주장에 의하면, 왜가 신라와 백제를 정벌하여 복속시킨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왜가 신라와 백제등 남부지방을 복속시키고 고구려와 대등한 전쟁을 치룬 기록이 그곳에 있으므로, 한국의 기록자체가 왜의 한밥도 지배를 입증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이 조선을 탈취해도 침략이 아니고 옛날부터의 권리를 회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풍신수길이가 이용했던 정벌의 정당성이었다. 그런 논리를 광개토왕비문을 근거로 해서 내세우면, 그것이 우리 것인지, 발견된 지도 모르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어떻게 대응했을까. 생각하기 싫은 일이다. 일본은 위장된 진실을 내세우며, 그것이 위장된 것인지는 알지만, 어디가 어떻게 위장된 것인지를 모르는 사람, 그 위장된 논리를 깨뜨릴 논리를 준비하지 못한 사람을 상대로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며 목적을 달성하고 있었다.
안용복 장군의 유적지를 둘러보고. 2008년 5월 24일
『삼국사기』라는 책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十三年, 夏六月于山国帰服, 歳以土宜為貢, 于山国, 在溟州正東海島 或名欝陵島, 地方一百 里, 恃嶮不服, 伊湌異斯夫為何瑟羅州軍主. 謂于山人其愚悍, 難以威来, 可以計服, 乃多造木 偶獅子, 分載戦船, 抵其国海岸, 誑告曰, 如若不服, 則放此猛獣踏殺之, 国人恐懼則降
이것을 이병도씨는 다음처럼 번역했다.
13년 6월에 우산국이 귀복하여 해마다 토산품을 바치기로 하였다. 우산국은 명주 (강릉)의 정동 쪽의 해도에 있어, 혹은 울릉도라고도 하거니와, 땅이 사방 백리로 자연이 험하여 그것을 믿고 (신라에) 귀복하지 않았다. 이찬 이사부가 하슬라주(강릉)의 군주가 되어 생각하길, 우산국 사람은 어리석고도 사나워 위세로써 내복케 하기는 어려우니 계 교를 써서 항복 받을 수는 있다며, 나무로 사자를 많이 만들어 전선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이르러 속여서 말하길, 너희들이 만일 항복하지 아니하면 이 맹수를 놓아 밟아 죽이겠다고 했더니, 그들이 두려워하며 즉시 항복했다.
울릉도와 독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내용으로, 역사적으로 독도의 영유를 말하는 일본의 주장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확인해주는 기록이다. 512년에 신라의 이사부가 지증왕의 명으로 우산국을 정벌하여 고려와 조선이 계승통치하다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독도의 영유권을 이야기하는 경우 이 기록을 근거로 드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아, 김부식이 기록한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이 기록이 갖는 의미는 많다고 생각하나 우선 우산국의 실체나 문화 정도라도 살펴보기로 한다.
이사부는 우산국 사람들은 어리석고 사나워 위세로 항복시키기 어렵다고 이야기했으나 그것은 우산국인에 대한 적대감으로 이미 이전에 우산국 정벌에 실패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산국사람들을 평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사부의 말대로 그들이 어리석기만 했다면 어찌 정벌에 실패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정복의 정통성을 확인할 필요에 의한 표현일 뿐이다. 삼국사기가 신라의 입장을 중시했기 때문에 취할 수 있는 표현이었지, 우산국의 입장을 중시하는 기록이었다면 오히려 신라는 침략했다 패주하는 나약한 세력으로 묘사되었을 것이다.
신라가 우산국 정벌에 한 번 이상 실패했다는 것은 우산국이 신라에 대적할 수 있는 세력을 확보한 국가였다는 것으로, 우산국에 이미 강력한 지도자로서의 왕이나 장수가 존재했었다는 것이 된다. 그 지도자는 침략받기 이전에 이미 울릉도를 중심으로 하는 우산국을 정립하고, 주변에 절대적 존재로 군림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 그것은 우산국 전체가 일정한 가치관을 공유하고 그것에 의거하는 질서로 통치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야 한다.
. 울릉도에는 동예는 물론 고구려와 신라의 세력은 물론 여타 삼한의 세력까지도 도해하여 거주했기 때문에 신앙이나 가치관 역시 다양했기 마련인데, 그 다양한 세력을 하나로 모아 통치하는 지도자가 나타났고, 그가 울릉도와 주변의 섬들을 영토로 하는 우산국을 건국한 것이다. 그럴 경우 울릉도의 중앙에 솟아있는 성인봉이나 우산국에서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우산도는 우산국 사람들이 같이 신앙하는 종교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특히 우산도의 경우는 거암이라는 것으로 거석을 숭배하고 싶어 하는 자들의 요구는 물론, 태양의 거주지로 보려는 자들의 신앙심까지 충족시켜줄 수 있기 때문에 우산국의 신앙의 대상이기에 충분했다. 또 우산도를 매개로 해서 천과 인연을 갖는 지도자의 존재도 설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지도자의 소유는 선택된 자신들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게 하고, 그 근원인 우산도에 대한 신앙도 깊어지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우산국이 우산도를 자신들의 세계에서 배제시켰다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야하는데 현재로서는 그럴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사자이야기다. 이사부의 계교는 나무로 만든 사자를 보이며 위협하는 것이었고 우산국사람들은 그것에 속아 항복했다 한다. 용감하기 그지없다는 우산국사람들이 나무로 만든 사자를 보고 항복했다는 것인데 문제는 그 사자가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에도 없고 인도에나 존재하는 맹수라는 사실이다. 경험을 해야 두려하거나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신라가 사자로 위협하고 그것을 우산국이 두려워했다는 것은 신라나 우산국이 사자를 경험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무제의 중국에 전래된 사자는 공간을 비상하는 능력을 부여받아 인간의 영혼을 안내하는 성수로 인식하게 되었고 그 허구의 능력을 기반으로 불법을 수호하는 성수로 발전하여 결국에는 석가여래의 좌방협사 문주보살이 타는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사자가 불교의 성수로 인식되고 있었다는 것은 우산국이나 신라가 불교를 경험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런데 신라의 불교공인은 512년 이후의 일이었다. 정상적이라면 우산국이나 신라가 사자를 경험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이 된다. 그러나 공인이 있기 전이라도 사람들의 왕래를 통해 전파될 수 있는 것이 문화라는 것을 감안하면, 양국 사람들이 중국이나 인도에 왕래하며 불교를 경험하며 사자를 인식하게 되었다는 가능성은 충분히 추정할 수 있다. 또 그 성수의 주적 능력이 자신들이 신앙하는 신들의 그것보다 우월하다는 것도 알았던 것이다. 그 같은 사전 경험을 바탕으로 신라는 사자로 위협했고 우산국은 그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우산국이 사자의 주적능력을 인지하지 못했다면, 나무사자를 두려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조소하며 쳐 부셨을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볼 것은 우산국의 국제교류와 문화의 정도다. 우산국의 불교인식은 우산국이 그것을 신앙하는 국가와 교류를 하고 있었다는 것이고, 사자를 두려워 했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불교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어도 이사부가 말한 대로의 국가가 아니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이다.
일본이 독도를 자국의 죽도라는 주장을 할 때 우리는 많이 당황한다. 더구나 정색을 하며 역사와 지리 그리고 국제법을 거론하며 영유의 정통성을 거론하면, 혹자는 일본에게도 어떤 정통성이 있는 것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침략을 근거로 하는 정통성 이외에는 아무런 정통성도 가지지 못하는 것이 일본의 주장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독도는 역사와 지리 국제법적으로 엄연히 우리의 영토인 것이다.
그런 사실임에도 일방적인 억지에 의한 분쟁은 존재한다. 그 부당함에 대한 분기를 독도사랑으로 실천하는 사람들과 같이 안용복 장군의 자취를 따라 시마네현과 돗토리현을 돌고왔다. 장군이라 호칭해도 모자랄 정도로 자신의 희생을 통해 공을 세웠던 안용복 장군의 유적지를 둘러보는 것은 좋은 일이나 그런 경험이 없다하여 연구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이번의 답사가 유익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며 자신의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열사적 행동가들과 동행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경험은 진실획인을 위한 열정으로 승화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신라의 이사부는 우산국의 정벌로 부귀영회를 보장받았던 것에 비해 조선의 안용복 장군은 공을 세우고도 치죄 당했는데 그러한 역사는 현재에도 반목되고 있는 것 같다. 일제가 물러난 후 어수선한 국제관계 속에서 독도를 사수했던 분들이 충분히 평가받지 못했던 사실이나 일본의 야욕을 분쇄하려고 노력하고 있는 현재의 시민운동가들의 희생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거나 행동하게 하는 생각에는 진실과 박력이 있어 성스럽다. 독도를 죽도라 칭하며 그것의 영유를 주장하는 세모의 죽도탑이 서있는 시마네역전에서의 일이다. 우리의 상식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탑을 목격한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침략을 본업으로 하고 침략에서 정통성을 구하는 국가의 실체를 다시 확인한 것이다. 동행한 분들의 탄식과 한숨만이 들렸다. 과격한 언행이 있을 법한데 오히려 조용했다. 서로가 상념으로 두런거리고 있었다. 이동하는 버스 속에서 한 여성이 시를 읊었는데, 조금 전의 모두가 그런 상념이었던 것 같다.
松江역에서// 방순미
마츠에 역 광장/ 죽도를 우리의 고유영토라는/ 지랄 같은 광고탑이 서있다./ 글을 접하는 순간/ 눈에 피가 솟구친다./ 대창으로 명치끝을 찔린 듯/ 불타는 몸뚱아리/ 서녘하늘에 걸려/ 노을이 붉다.// 섬 독도를 받쳐 올린 물/ 바닷길을 뚫고 봇물 터지듯/ 마츠에로 밀려온다/ 끝이 보이지 않는 松江湖/ 섬은 물이랑 되어/ 섰다지고 섰다지며// 독도는 우 리 땅!/ 몸시를 쓴다.
많은 말들이 있으나 지랄 피 대창 등이 나에게는 부각된다. 지랄같은 것을 보고 지랄같이 되는 심상을 아름답게 승화시킨 것이다. 이것을 인내라 하는 지도 모른다. 인내하며 생각을 다지는 것은 원수도 사랑할 수 있는 감정의 조절이다. 자기 것에 대한 아름다운 사랑이 있어 가능한 일이다. 구구절절이 마음에 와 닿는다.
문득 이러한 마음을 가진 우산국의 지도자가 떠오른다. 우산국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하여 나라를 건국하고 성인봉이나 우산도를 거주하는 신들의 수호를 빌며 신라에 대항하면서 독자적이려했던 우산국의 지도자가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같은 버스에 타고 있는 분들이 그 환생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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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엽의 우산국과 안용복 우산국 관련 잡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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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最終更新:2009-08-23 08:05:4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