このWIKIを編集するにはパスワード入力が必要です

認証パスワード
RSSフィード

kw-260

  
목록열기  목록닫기    전체목록 (74)   
  


글 보내기 서비스 안내
2009년 6월 30일 네이버 여행 서비스가 종료되었습니다.
네이버 여행 서비스를 이용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리며,
더 좋은 서비스로 보답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문서파일로 저장하기   
파일로 저장하기 버튼을 누른 후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이 기능은 베타 서비스 중입니다. 변환 후 배경음악등 일부 내용은
정상적으로 표시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문서파일로 저장하기 메뉴 도움말


    
이진희 호태왕비문 [나의 책]  
2008/05/31 13:47

http://blog.naver.com/kwonoyub/110031619527 
이 포스트를 보낸곳 ()

 









호태왕비연구와 그 후







저자 이진희

역자 권 정
















































머리말
















 

 전후 일본에서 통설로 되었던 4・5세기의 사상(史像)은, 야마토 정권이 4세기 후반에 조선반도에 대군을 출병하여, 「미마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두고 2세기에 걸쳐 가야(伽耶)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고대사상은, 잘못된 기기사관(記紀史觀)을 극복한 과학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학계에서는 광개토왕(이하 호태왕이라 한다)릉비문의 「倭以辛卯年來渡海破百殘□□□羅以爲臣民」의 부분을 중시하여, 신묘년(391)에 바다를 건너가서 백제나 신라를 정복할 수 있었던 정치 세력(비문상의 「왜」)은 야마토정권 이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고 해석했다. 그리고 야마토정권이 출병했던 사실은 전쟁을 했던 상대측(고구려)의 석비에 새겨져 있기 때문에, 더욱이 의문을 품을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이것이 전후 학회의 일치된 견해였다.

 그러나 조선반도의 남부지방에서 「미마나일본부」설을 증명할 수 있는 유적・유물(遺物)은 발견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부산 근처의 김해를 「미마나일본부」의 유력한 본거지로 가정하여 많은 학자가 발굴을 시행했고, 1917년부터는 경상도 서부의 가야제국의 영역으로 조사 대상을 넓혔다. 토우쿄우대(東京大)와 쿄우토대(京都大), 조선총독부의 학자들이 이에 참가하여, 조사는 1921년까지 계속되었으나, 어떠한 단서도 얻을 수 없었다. 이와 관련하여, 하마다코우사쿠(浜田耕作)는 1921년에 「조선의 고적조사」라는 논문 중에서, 「그 미마나라는 것이 일본이 건국한 후에 보낸 식민지라는 선입관은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 最終更新:2009-08-23 08:09:49